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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기대 배신하고 기대 뛰어넘고

입력 | 2009-10-27 03:00:00


《영화를 보는 건 ‘소개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각종 정보에 따라 영화를(이성을) 소개받지만, 막상 관람하고(소개팅을 하고) 나서 받는 실제 느낌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대와 영 달라 절망하기도 하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횡재를 한 듯한 만족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최근 본 영화 중 기대를 완전히 배반하거나(↓) 당초 기대를 훌쩍 뛰어넘어버린(↑), 딱 기대만큼만 한(←→) 영화들을 꼽아본다.》

↓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영화 제목부터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절망은 이르다. 영화의 내용은 이 난해한 제목보다 100배는 더 뭐가 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린 파파야 향기’ ‘씨클로’ 같은 감성적인 명작들을 연출했던 베트남 출신 트란 안 훙 감독의 신작이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대중예술가가 작정을 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면 이렇게까지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반면교사용 영화라 하겠다.

고통과 수난, 치유와 초월이라는 유식한 키워드들을 촘촘한 사건과 이야기 위에다 태우는 데는 애당초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미지즘과 초현실주의를 통해 메시지와 감정만을 무지막지하게 강요하니…. 러닝타임 110분을 견뎌내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수난이요, 치유요, 초월이라고나 할까. 한국, 미국, 일본을 각기 대표하는 배우인 이병헌, 조시 하트넷, 기무라 다쿠야가 사탄, 원죄적 인간, 예수의 현현을 상징하는 인물로 각각 출연해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그런데 왜 저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거지?’라는 근원적 질문을 시종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트란 안 훙 감독의 실제 아내로 ‘그린 파파야 향기’와 ‘씨클로’에서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여배우 트란 누 옌 케가 암흑가 보스(이병헌)의 운명적 여인으로 출연하지만, 기다란 발가락과 파란색 페디큐어를 빼곤 그녀가 남기는 인상은 없다.

↑ ‘호우시절’

 허진호 감독의 신작 ‘호우시절’. 영어 대사의 한계를 넘어 애틋하고도 안타까운 사랑의 섬세한 감정을 전달한다. 사진 제공 판씨네마

큰 기대 안 했는데 막상 보고 나면 ‘대어’를 낚은 기분. 단, 태어나서 사랑의 깊은 상처를 세 번 이상 경험한 30대 이상이 아니라면 ‘아유, 심심해’ 할 수도.

최근 ‘외출’과 ‘행복’을 보면서 허진호 감독에게 다소 실망했지만, 이 영화를 보면 사랑과 기억, 그리고 시간이라는 화두를 허 감독처럼 섬세하게 풀어내는 감독은 역시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야기에서 정서를 끌어내는 대신, 정서로부터 이야기를 뽑아내는 허 감독의 특허기술이 제대로 발휘된 경우다.

자극적인 이야기 없이 사랑의 개연성과 보편성을 얻어가는 이야기 전개가 돋보인다. 오랜만에 재회한 과거 연인들이 떨어지는 빗속에서 나누는 선문답 같은 다음 대사는 최근 1년 사이 들어본 영화대사 중 가장 아름답다.

“내가 처음부터 널 사랑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에게 달라지는 게 있을까?”(남자)

“꽃이 펴서 봄이 오는 걸까, 아니면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여자)

단지 영화보다 훨씬 재미없는 영화 포스터와 ‘처음보다 설레고 그때보다 행복해’라는 당최 ‘필(feel)’이 안 오는 홍보문구는 불만. 그 잘 빠진 몸매를 가진 정우성이 입고 나오는 후줄근한 양복 정장도 눈에 거슬린다.

←→ ‘굿모닝 프레지던트’

‘아, 이런 낭만적인 대통령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바람과 동시에 ‘아, 정말 이런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있다면 국민이 하루하루 얼마나 불안해할까?’라는 걱정도 사서 하게 만드는 영화. “이 세상을 살린들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을 못 살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멋진 말과 함께 임기 중 신장 이식을 선언하고 실행에 옮기는 대통령(장동건)이라니…. 이 영화를 통해 ‘정치에 있어서 정의로움과 포퓰리즘은 종이 한 장 차이’임을 실감한다.

소소한 대화 속에서 독특한 리듬감을 뽑아내며 공감 가는 웃음을 만드는 장진 감독의 솜씨가 탁월하지만, ‘한 방’이 부족한 느낌. 미남배우 장동건의 코미디 연기 변신도 성공적이지만 동시에 연기의 한계가 드러난 영화이기도 하다. 일탈까진 아니더라도 더 많은 감정적 경험이 ‘자연인’ 장동건에게 필요함을 느끼게 하는 영화.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