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 왕후들의 거처일제, 유원지로 격하동물원-꽃놀이 터로
《“임군 일흔(임금 잃은) 창경원에는 아직도 비색(悲色)이 가득하여 것칠 날이 묘연한데 애통 중에 계시면서도 (…) 일반 민중에 위안을 주시고저 시민의 산책처로 유일무이한 창경원을 개원하도록 하념을 나리시리라는 말슴이 숭문되는데 왕 뎐하의 어자심이 그토록 넓으심으로 칠월경부터는 개원하라는 분부가 계시리라더라.” ―동아일보 1926년 6월 15일자》
1921년 봄 창경원 꽃놀이를 즐기는 군중. 동아일보 자료 사진
순종 승하 두 달 뒤인 1926년 7월 1일 동아일보에는 ‘구주(舊主)는 백옥누로 곤룡포는 박물관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순종이 입었던 곤룡포를 창경원 통명전에 전시하고 일반에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승하하옵신지 아직 몃칠 되지 안은 지금부터 이러한 것은 실로 다시금 눈물지을 일이더라”라고 끝맺었다.
1931년에는 경복궁 동십자각과 창덕궁 돈화문 앞을 잇던 길이 연장돼 역대 왕의 혼을 모신 종묘와 창경궁의 연결이 끊겼다. 이후 이곳을 둘러싼 이야깃거리는 대개 꽃놀이와 동물원이었다. 인도산 구렁이와 사자원숭이, 새끼를 낳은 하마와 알을 낳은 백학, ‘새로 시집 온 처녀 물개’ 등이 뉴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1937년 7월 10일 동아일보엔 ‘서울 한복판에 너구리 출현, 잡아서 창경원에 기증’이란 기사가 실렸다.
“동물원을 그리워하는 어린아이 ‘태하’는 생후에 처음 보는 호랑이를 대할 때 무서운 줄은 알면서도 동무처럼 반가웁고 기뻐 가까이 들어갓다가 깊은 산 속에서 대궐 울안에 갇힌 지 다섯 날 되는 암호랑이에게 그만 할키어 참화를 당한 직시로 대학병원에 입원하야 매우 위험하다고 한다.”
창경궁은 광복 뒤 한 세대가 저물도록 복권되지 못했다. 1963년 사적 제123호로 지정됐지만 계속 유원지로 쓰이다가 1981년 정부의 창경궁 복원 계획이 나오고 나서야 서서히 본모습을 찾았다. 동물원은 1984년 경기 과천시 막계동으로 옮겨져 서울대공원으로 개장했다. 식물원 온실은 그대로 남았다. 서울시는 2011년까지 창경궁과 종묘 사이 율곡로를 지하도로로 바꾸고 그 위에 녹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