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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창경원’ 나들이

입력 | 2009-11-02 03:00:00

선대 왕후들의 거처
일제, 유원지로 격하
동물원-꽃놀이 터로




《“임군 일흔(임금 잃은) 창경원에는 아직도 비색(悲色)이 가득하여 것칠 날이 묘연한데 애통 중에 계시면서도 (…) 일반 민중에 위안을 주시고저 시민의 산책처로 유일무이한 창경원을 개원하도록 하념을 나리시리라는 말슴이 숭문되는데 왕 뎐하의 어자심이 그토록 넓으심으로 칠월경부터는 개원하라는 분부가 계시리라더라.” ―동아일보 1926년 6월 15일자》

1921년 봄 창경원 꽃놀이를 즐기는 군중. 동아일보 자료 사진

1483년 조선 성종 때 창건한 창경궁은 선대 왕후들의 거처답게 건물을 오묘하게 배치해 둘러싼 중정(中庭)이 아름다웠던 곳이다. 을사늑약으로 한반도의 지배권을 앗아간 일제는 1909년 문정전 등 전각을 헐어 동물원 식물원을 짓고 수천 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다. 정원도 일본식으로 바뀌면서 자연스러운 여백을 잃었다. 이해 11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동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이었다. 창경궁은 1911년부터 창경원으로 불렸다. 일제가 창경궁의 위엄을 놀이동산 개념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순종 승하 두 달 뒤인 1926년 7월 1일 동아일보에는 ‘구주(舊主)는 백옥누로 곤룡포는 박물관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순종이 입었던 곤룡포를 창경원 통명전에 전시하고 일반에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승하하옵신지 아직 몃칠 되지 안은 지금부터 이러한 것은 실로 다시금 눈물지을 일이더라”라고 끝맺었다.

1931년에는 경복궁 동십자각과 창덕궁 돈화문 앞을 잇던 길이 연장돼 역대 왕의 혼을 모신 종묘와 창경궁의 연결이 끊겼다. 이후 이곳을 둘러싼 이야깃거리는 대개 꽃놀이와 동물원이었다. 인도산 구렁이와 사자원숭이, 새끼를 낳은 하마와 알을 낳은 백학, ‘새로 시집 온 처녀 물개’ 등이 뉴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1937년 7월 10일 동아일보엔 ‘서울 한복판에 너구리 출현, 잡아서 창경원에 기증’이란 기사가 실렸다.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가던 꽃놀이 인파와 동물원 소식이 반복되는 중에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1933년 3월 31일 동물원 암호랑이가 여섯 살 아이를 할퀴어 중상을 입히는 사고가 났다. 동아일보는 ‘고기 주린 맹호의 토끼 못 먹은 분푸리 범행’이라는 4월 1일 기사에서 선혈 낭자했던 현장 모습과 함께 아들을 몸으로 감싸 구해낸 어머니의 사연을 전했다.

“동물원을 그리워하는 어린아이 ‘태하’는 생후에 처음 보는 호랑이를 대할 때 무서운 줄은 알면서도 동무처럼 반가웁고 기뻐 가까이 들어갓다가 깊은 산 속에서 대궐 울안에 갇힌 지 다섯 날 되는 암호랑이에게 그만 할키어 참화를 당한 직시로 대학병원에 입원하야 매우 위험하다고 한다.”

창경궁은 광복 뒤 한 세대가 저물도록 복권되지 못했다. 1963년 사적 제123호로 지정됐지만 계속 유원지로 쓰이다가 1981년 정부의 창경궁 복원 계획이 나오고 나서야 서서히 본모습을 찾았다. 동물원은 1984년 경기 과천시 막계동으로 옮겨져 서울대공원으로 개장했다. 식물원 온실은 그대로 남았다. 서울시는 2011년까지 창경궁과 종묘 사이 율곡로를 지하도로로 바꾸고 그 위에 녹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