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이십일 오전 중에 시내 약초성 사는 소송원오랑이라는 사람의 명의로 딴스홀 허가원을 경긔도 보안과에 제출하얏다. (…)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에서 이와 가튼 사교긔관이 업슴으로 말미암아 외국에서 경성을 찾는 손님들도 무엇에 정을 부치지 못하고 오락가락 하다가 경성을 떠나게 됨으로 이에 따르는 손실이 있다.’ ―동아일보 1931년 4월 21일자》
“경성에도 딴스홀을…”
젊은층 양성화 요구
日帝끝내 허가안해
교육적 목적을 띤 1920년대 여학생들의 야외 댄스. 당시 양풍의 유입과 함께 은밀한 비밀 사교댄스장도 유행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제는 가정집, 강습회에서의 ‘딴스’를 허용했지만 ‘딴스홀’은 허가하지 않았다. 풍기가 문란해진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경성 시민들은 카페나 요릿집에서 유성기를 틀어놓고 ‘찰스턴’ ‘블루스’ ‘왈츠’를 즐겼다. 사교 딴스클럽도 비밀리에 운영됐다. 경찰은 불법 딴스교습소 적발에 열을 올렸다.
서양 문화에 심취했던 젊은 층이 특히 ‘딴스’에 열심이었다. ‘향락의 첨단을 것고 잇는 장안의 일류 모던뽀이와 모던껄들이 본정통(충무로) 모모처를 무대삼고 딴스를 한다.’ 1937년 7월 27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다.
음성적 ‘딴스홀’이 문제가 되자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마담 복혜숙,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 바 ‘멕시코’ 여급 김은희, 동양극장 여배우 최선화 등 8명은 딴스홀을 허가해 줄 것을 경무국장에게 요구하는 글을 ‘삼천리’ 1937년 1월호에 실었다.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 ‘딴스홀’에 가면 5전 10전 하는 티켓값만 있으면 하루 저녁을 유쾌하게 놀고 올 것이 아니오리까… 우리가 동경 갔다가 ‘후로리다 홀’이나 ‘제도 홀’ ‘일미 홀’ 등에 가서 놀고 오는 것 같은 유쾌한 기분을 60만 경성 시민들도 맛보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일제는 패망 때까지도 ‘딴스홀’을 허락하지 않았다. 광복 후 댄스홀은 1960년대 ‘카바레’, 1970년대 ‘고고장’, 1980년대 ‘디스코텍’, 1990년대 ‘록카페’, 2000년대 ‘테크노 바’ ‘힙합 클럽’ 등으로 변하며 그때마다의 유행 음악과 시대상을 반영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젊은이들의 주말 밤은 항상 뜨겁고 그들은 언제나 마음껏 춤을 출 수 있는 ‘젊음의 해방구’를 찾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