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효된 알코올 특유의 신맛 다음엔 곡류(穀類)의 단맛이, 마지막엔 입 안으로 솔잎의 은은함이 퍼졌다.
이제까지 마셔본 어떤 술과도 달랐다.
한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 술로 인정받은 ‘계명주(鷄鳴酒)’ 이야기다.
“황혼 무렵에 술을 빚으면 새벽닭이 울 때 마실 수 있다고 해서 ‘계명주’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간단하게 만들어 마실 수 있는 만큼 평안도 지역에서는 집집마다 퍼져 있던 술이 바로 이 계명주입니다.”》
“죽쒀 만든 北 제삿술 알고보니 고구려 술”
국내 유일의 계명주 명인인 최옥근 씨(66)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만큼 계명주는 평안도 지역에서 빨리 만들어 빨리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최 씨는 “당장 내일이 제사인데 집에 술이 없으면 계명주를 급하게 만들곤 했다”며 “그 특성 때문에 이북에서는 ‘잔치술’, ‘속성주’라고도 했고, 엿기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엿탁주’라는 이름도 붙었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전통주는 지에밥으로 빚지만 계명주는 죽을 쑤어 술을 만든다. 일주일 동안 묵혀둔 누룩에 옥수수와 수수를 갈아 넣고 물을 부어 죽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죽을 삼베자루로 거르고 솔잎과 함께 발효시키면 계명주가 된다. 계명주의 신맛과 단맛, 그리고 향은 누룩과 수수, 솔잎이라는 세 가지 주요 원료가 어우러진 것이다. 알코올 도수는 7∼16도.
최 씨가 처음부터 ‘계명주’라는 이름을 알고 이 술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최 씨의 남편인 장기항 씨(2005년 작고)와 시어머니 고 박채형 씨는 6·25전쟁 당시 평남 용강군에서 서울로 월남했다. 이때 가지고 내려온 집안의 ‘기일록(忌日錄)’에는 조상의 제삿날과 함께 제주(祭酒) 담그는 방법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23세 때 시집 와서 그 이듬해부터 술 만드는 일을 했어요. 매일매일 제삿술 만들 죽을 쑤라고 시키니 처음에는 이 술이 뭔지도 모르고 시집 잘못 왔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지금이야 가스불이 있어서 금방 되지만, 가마솥에 불을 땔 때는 그야말로 중노동이었죠.”
그러다 경기 남양주에 멧돼지 식당을 차리면서 계명주의 진가가 드러났다. 오가는 손님들에게 집안 전통의 가양주(家釀酒)를 맛보라고 조금씩 만들어 줬더니 처음 보는 술의 기원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계명주의 ‘뿌리 찾기’가 시작됐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이들은 집안에서 전통적으로 빚어 오던 가양주가 동의보감에 기록된 ‘계명주’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 씨는 198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1호로 등록됐고 1996년에는 농림부가 지정하는 ‘식품 명인’이 됐다. 자칫 잊혀질 뻔한 역사 속의 술이 개인의 노력으로 다시 살아난 셈이다.
어렵게 살아난 계명주지만 지금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공장을 남양주에서 경기 이천으로 옮기며 2년 가까이 술 생산을 하지 못하고 있다. 최 씨가 가끔씩 소규모로 술을 만들긴 하지만 대량 생산은 끊어졌다. 계명주라는 이름이 낯선 것도 그 탓이 크다. 한때 서울지역 전통주점에 납품해 좋은 호응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은 다시 ‘아는 사람만 사는’ 술이 됐다. 대량생산 시설과 술을 홍보할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장 씨와 최 씨로부터 계명주 제조기술을 전수받은 제자 이창수 씨(54)는 “술을 맛보는 사람마다 ‘이 술을 가지고 왜 팔지 못하느냐’고 타박하다 보니 가끔 전수자로서 자괴감까지 들 때가 있다”며 “내년 2월부터 공장을 다시 남양주에 세우고 본격 생산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 내놓는 계명주는 최근 일고 있는 막걸리 열풍에 힘입어 ‘고급 발효주’답게 고급화와 젊은층 공략에 나설 계획이다.
최 씨는 “제사를 지낼 때 일본 술인 ‘정종’을 제사상에 올리는 가정이 아직도 많다”며 “한국 전통주를 사용한다면 전통주가 다시 살아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