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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작가 릴레이 인터뷰]‘트라우마’의 곽백수 작가

입력 | 2009-11-05 15:36:40


 ‘트라우마’의 곽백수 작가.

"불을 붙여라!"

시대는 중세. 한 아름다운 여인이 기둥에 묶여 있다. 여인의 발밑으로는 장작이 쌓이고. 그리고 이어지는 화형 집행관의 외침.

"이 사악한 마녀! 요사스런 웃음으로 사람들을 홀려서 사탄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인 이 창녀 같은 것, 어서 불을 붙여라!"

‘트라우마’ 마녀사냥편의 한장면.

누군가 장작에 불을 붙이고 여인의 몸 주위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묻는다.

"하하하,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없느냐?"

마녀로 몰린 아름다운 여인이 대답한다.

"여기있는 남자들과 한번씩 해 보고 싶었는데…."

그러자 남자들은 더 진지한 표정으로, 더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한다.

"불을 꺼라! 불을 꺼라!"

곽백수 작가(37)의 웹툰 '트라우마'의 마녀사냥편. 트라우마는 2003년 1월부터 스포츠서울에 연재를 시작해 네이버 등 인터넷을 통해 모두 1500여편이 나갔다.

이중 마녀사냥편은 트라우마의 '엽기' '반전' '허무' 코드를 한 눈에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

'정신적 충격'이라는 뜻의 '트라우마'라는 제목답게 독자들은 '웃음의 트라우마 상태'에 빠지며 지난해까지 이 만화를 즐겼다.

하지만 곽 작가 자신이 현재 트라우마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평범한 가정, 무난한 성장과정

 곽 작가가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군 복부 시절이었다. 상병 계급을 달고 군 생활에 적응이 돼 갈 때쯤 퍼뜩 '제대하고 졸업하고 나면 뭐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나와 대학까지 왔으나 그는 딱히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그림은 좀 그린다는 소리를 듣던 그는 어느 날 밤 경계근무를 서면서 '그래, 만화가가 되자'라고 혼자 결심하고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만화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작품을 후세까지 남기자?'

이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화가 하면 돈 잘 번다더라.' 이게 진짜 이유였다.

그리고 제대 후 진짜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98년 습작이자 데뷔작인 단편 '투멘코미디'를 만화잡지 '영점프'에 게재하면서 데뷔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걸로 일단 끝이었다. 만화가가 되면 돈 잘 벌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만화가는 굶어죽기 딱 좋은 직업이었다.

▲촬영·편집 나성엽 기자

2001년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만 믿고 이름 그대로 '백수'인 상태에서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입에 풀칠은 하겠지, 막노동이라도 하면 되지' 단순하게 생각했다.

2002년 아내가 임신을 하자 단순한 그의 두뇌구조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받아서 아이를 키울 수는 없는 일. 아버지가 조그만 공장을 갖고 계셔서 수입은 꾸준했지만 그렇다고 부자는 아니었다.

그해 그는 트라우마를 그렸다. '스포츠 신문 연재 작가가 되면 돈을 많이 번다'는 얘기를 듣고 여기 저기 스포츠 신문사 문을 노크했다.

"여보세요, 거기 XX스포츠죠? 저는 곽백수라는 만화가인데요…."

"아, 네 이메일로 보내세요."

뚝, 전화가 끊겼다.

스포츠OO사는 담당 기자를 만나는 데 까지 성공했다.

‘트라우마’의 곽백수 작가.

"신인작가입니다. 기회가 되면 앞으로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작품을 좀 봐주십쇼."

"네, 제가 나중에 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기자는 곽 작가의 원고를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 뒤로 연락은 없었다.

곽 작가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일간스포츠의 장상용기자다.

장 기자는 그의 작품을 인정해줬다. 하지만 당시 일간스포츠에는 곽 작가의 만화가 들어갈 지면이 없었다. 양영순의 '아색기가'가 대 히트를 치고 있어 '앞으로 상당 기간' 다른 만화를 게재할 여력도 필요도 없었다.

장 기자는 곽 작가의 그림을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하다못해 한 컷 짜리 스포츠 만평이라도 실어 주려고 노력했으나 생각처럼 지면이 쉽게 나지 않았다.

곽 작가는 "스포츠서울로 데뷔해 성공한 입장에서 다른 회사 얘기를 하기가 좀 쑥스럽지만 지금도 장 기자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고마움을 뒤로 하고

신문 연재 길이 막힌 곽 작가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로 칭찬받을 상황도 아니었고 '꿈을 향한 열정'을 떠올리며 눈을 번뜩이지도 않았다. 곧 태어날 아이에게 인사하면서 "아빠, 백수야"라고 얘기하기가 싫었을 뿐이다.

'죽이 돼든 밥이 돼든 해보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동안 그려뒀던 작품을 개인 홈페이지에 하나 둘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즉각 반응이 왔다. 고정 독자가 늘어났고 '웃다 죽을 뻔 했다'는 의견이 올라왔다. 2002년 11월이었다.

그리고 스포츠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게재하자"고 했다.

트라우마는 이렇게 해서 2003년 1월 마침내 빛을 보게 돼 이후 인터넷 포탈 사이트 등에서도 연재되며 하루 고정 독자만 40만 명 이상이 찾는 히트상품이 됐다.

장발장이 훔친 은촛대를 보며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신부님에게 "마음씨가 좋으니 금촛대도 드리겠다"는 형사, TV 정규 뉴스시간에 갑자기 전국으로 방송되는 외계인의 전쟁 선포 메시지가 끝나자 태연스럽게 "화면이 고르지 못했습니다"라고 사과하는 앵커….

기존 동화나, 영화의 과장되게 진지한 구조를 허무하게 무너뜨리는, 과도하게 진지해 웃긴 캐릭터들을 보며 독자들은 열광했다.

곽 작가도 열광했다.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복무시절의 꿈 아닌 꿈 '만화를 해서 돈을 벌자'는 단순한 계획, 아이가 태어났을 때 직업과 이름이 똑 같은 사람이 되지 말자는 단순한 꿈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생계형 만화가', 곽 작가는 그때부터 미친 듯이 책을 보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24시간 TV를 켜 놓고 신문을 파며 트라우마에 열중했다.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침 6시 7시까지 작업하는 일이 많았고 한 번 책상에 앉으면 12시간씩 안 일어나는 일이 허다했어요. 그때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트라우마’의 곽백수 작가.

그에게 찾아온 진짜 트라우마

2007년 4월. 오른쪽 뺨에 경련이 멈추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뇌신경 이상으로 경련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해 주세요."

간단한 수술인 줄 알고 무심코 침대에 드러누운 게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 놨다.

수술은 성공했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그 뒤부터 오른쪽 얼굴이 마비됐다. 지금도 웃으면 왼쪽 얼굴만 웃는다.

그는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면 내 웃는 모습을 보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엉킨 신경과 혈관을 떼어놓기 위해 현재 그의 머릿속에는 인공뼈와 보형물이 들어가 있다.

수술이나 후유증은 참아낼 만 하다. 지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건강염려증'이다.

하다못해 턱 밑이 가려워서 긁고 싶을 때도 '어디 몸에 큰 문제가 생겨서 가려움이라는 증상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을 먹는다.

매운 낙지 먹고 속이 쓰리면 '혹시 내장 어디에 큰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불안해서 잠을 설친다.

수술 후 2년째가 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되기는 했지만 지난 1년 반 동안 그는 거의 일을 손에 잡지 못했다.

'차라리 그때 수술을 안 받았으며 그냥 오른쪽 뺨 경련 일으키면서 잘 살고 있지 않을까', 후회할 때도 있다.

하지만 수술은 그에게 결과적으로 약(藥)이 됐다.

수술은 단순하게 하고 싶은 일 하며 살던 그에게 이웃을 돌아보는 따뜻한 시선을 선물했다.

"예전에는 주위에서 누가 힘들어하거나 아파하면 '에이 뭐 그딴 걸 갖고 그래'라고 말하면서 저는 별루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가 한번 아파보고 후유증이 남으니까 사람들 삶의 무게가 느껴지더라고요."

수술 후에도 1년여간 연재를 지속하다가 지난해 5월 마지막 회가 나간 트라우마는 이달 말 야후를 통해 다시 선보인다.

트라우마 속 등장인물들처럼 단순하게 살아왔으나 개인적 고통을 겪으면서 따뜻한 시선을 가진 이웃으로 다시 태어난 곽 작가.

그는 "개인적인 경험이 작품에 반영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목적에는 다소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동안 트라우마는 오로지 웃기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웃으면서 피곤을 잊을 수 있는 만화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트라우마. 이미 3개월 치를 그려놨다는 그의 다음번 트라우마가 기대되는 이유다.

글/사진=나성엽 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