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황금어장'에 출연한 원더걸스
한동안 '아이돌 산업역군론'이 연예계를 떠돌았다. 10대의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70년대 공장 미싱 돌리듯 피눈물 나는 연습 끝에, 한풀 죽은 한류를 떠받치는 것이 이제는 아이돌 스타란 얘기다. 실제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서 한국 아이돌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다.
이쯤에서 한류기획자들은 갈림길에 도달한다. 한 부류는 "이 기회에 아시아 시장을 장악하자"고 주장한다. 또 한 부류는 "주류시장인 미국 진출 없이 한류는 (지속)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마치 80년대 초반 미국과 유럽에 현지 생산 공장을 세울지를 고민하던 삼성이나 LG를 보는 듯하다. 후자의 대표주자가 바로 JYP의 박진영이다.
일각에서는 "쟤네들 왜 저기서 생고생이냐"고 의아해했지만 보란 듯 대표곡 '노바디'를 '빌보드 Hot 100차트(76위)'에 올리며 미국 시장에서 첫 결실을 거뒀다. 아시아 가수로는 4번째이고 1980년대 이후론 처음이란다. 마땅히 경하해야 할 일이다.
● 또 한번 큰 일 낸 박진영, 그러나…
원더걸스가 귀국기념으로 MBC '황금어장'에 출연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젠 거물로 성장한 박진영과 원더걸스가 출연할만한 토크쇼는 강호동의 '무릎팍도사'가 유일한 상황. 실제 원더걸스 멤버 5인은 "노바디 좀 그만 불렀으면 좋겠다"며 그간 겪은 어려움과 설움을 쏟아냈다.
11월4일 밤 11시, 비교적 늦은 시간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원더걸스의 출연시간은 15분 정도 밖에 안됐다. 박진영이 마이크를 독점해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돌이지만 더 이상은 어리지 않은 가수들이 스타기획자의 병풍으로 전락한 꼴이 됐다.
미국 가수들이 전용기를 타고 전미투어를 할 때 이들이 삐거덕거리는 침대차에 타고 미국을 횡단한 순간이나, 당초 13회 공연을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짤릴' 위기에 처한 상황을 들려주는 대목에서 원더걸스 멤버들은 침울해했다. 예은이는 살짝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지켜보던 강호동은 "사람이 성장하는 데 고생만한 것이 없다"고 박진영을 거들었다.
이 순간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TV토크쇼는 한바탕 원더걸스의 수다가 아닌 '한 기획자의 위대한 모험정신을 칭송하고 이를 충실하게 실천한 순박한 소녀 근로자 격려의 무대'로 변질됐다.
● 원더걸스의 목소리를 고대하며
박진영은 국내 가요계에서 극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는 기획자이다. JYP소속 가수들의 탁월한 상품성은 인정하지만 그들이 마치 박진영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박진영의 대표작인 God나 비도 홀로 토크쇼에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언제나 박진영의 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제 많은 국내 소비자들은 박진영의 목소리도 궁금해 하지만 원더걸스의 독자적 목소리도 듣고 싶어한다. 그들이 어떤 멸시와 모멸을 딛고 이 자리에 올랐는지 박진영의 시선이 아닌 선예와 선미의 체험을 통해 얘기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무릎팍 도사'에 박진영과 원더걸스가 따로 출연했더라면 어땠을까. 원더걸스의 미래가 걱정스러워지는 순간이다.
# 결정적 장면
당초 '조나스 브라더스' 순회공연에 2곡으로 13회 출연을 약속한 원더걸스는 초기 공연에서 관객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노래가 1곡으로 줄고 심지어 중도하차 위기에 몰린다. 절체절명의 순간 원더걸스는 '무대장치' 준비가 미흡한 순간을 파악하고 제작진의 허락도 없이 무대 위로 뛰어 오른다. 한국에서의 행사 경험을 살려 관객들에게 '노바디' 댄스를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은 것. 가장 어린 소희가 "에브리바디 스탠드 업!"을 소리치며 깜직하게 분위기를 띄우자 이에 감동받은 제작진들은 48회 전 공연 오프닝 공연을 허락하기에 이른다. 박진영은 "저는 기획을 했을 뿐, 무대에서 관객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아이들의 힘이다"고 원더걸스를 칭송한다. 좌중숙연.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