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조선호텔. 1958년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1914년 지어진 원형을 유지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선호텔 지배인으로 온 사퇴시예 씨는 말하되 조선호텔로 말하면 여러 외국사람들을 만히 접대하기 때문에 그 디위가 국제적인즉 (…) 의복범절에 대하야는 일본사람들은 나막신을 신고 함부로 올나오는 일이 있스나 조선사람 중에는 모다 신사의 태도를 직히어서 감사한 일이라고 말하더라.’ ―동아일보 1921년 5월 16일자》
침대와 가구가 구비된 서구식 숙박시설 호텔은 개항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개항 초기 숙박업은 부산 원산 인천을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외국인 상인들이 단골 고객이었다. 최초 호텔도 1889년 인천 선린동에 세워진 ‘대불호텔’이었다.
서울에는 1902년 정동 이화여고 근처에 ‘손탁호텔’이 처음 문을 열었다. ‘사교계의 꽃’으로 불렸던 독일 여인 손탁이 고종에게 하사받은 터에 지은 2층 양옥 호텔이었다. 객실 식당 연회장을 갖췄고 미국인을 주축으로 결성된 사교모임 ‘정동구락부’도 여기서 열렸다. 호텔은 신식 문물의 창구이기도 했다. ‘양탕국’이라고 불리던 커피가 첫선을 보인 것도 대불호텔에서였다.
이후 일본이 한반도에 철도를 개설하기 시작하자 역 주변에 철도호텔이 들어선다. 1912년 부산역사에 지은 2층 호텔을 시작으로 신의주철도호텔 조선경성철도호텔 금강산호텔 등이 개관했다. 하지만 운영상의 이유로 철도호텔은 민간자본에 넘어간다. 1932년 3월 30일 동아일보에는 철도호텔 민영화 기사가 실렸다. “조선철도국에서 경영하는 철도호텔과 렬차식당은 매년 평균 육만 원가량의 절손을 보게 됨으로… 지금까지 이에 종사한 사무원들로서 20만 원 자금의 철도호텔급 식당차 주식회사를 조직하고 이것을 인수 경영키로 되었다.”
1970년 다시 문을 연 조선호텔은 지하 2층 지상 18층 500개 객실을 갖추며 서울을 상징하는 건물이 됐다. 1979년 ‘웨스틴조선호텔’로 이름을 바꿨다.
1960년대 이후 관광사업은 정부와 민간기업의 노력에 힘입어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으로 발전했다. 1970년 5월부터 관광호텔에 등급이 생겼고 지배인 자격시험제도도 이때부터 시행됐다. 관광지식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08년 현재 전국 관광숙박업체는 총 570개. 이 중 특1등급 호텔은 54개다. 특1∼3등급에 묵는 외국인만 연간 1535만9854명으로 집계됐다. 내국인 1702만 명과 큰 차이가 없는 수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