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을 위한 가슴 벅찬 성공스토리"
화제의 드라마 KBS 열혈장사꾼.
"너희들이 이런 이론을 배우면 솔직히 이해가 되니? 진짜 돈을 벌고 경영을 알기 위해선 동대문 나까마(중간상인의 속칭)에서부터 시작해야지…."
90년대 경영학 수업 시간엔 교수들의 푸념이 빈번히 이어졌다. 세상물정 모르는 20대 초반의 대학생 앉혀놓고 '기업가 정신'이니 '원가 관리 회계'를 가르쳐봐야 결국은 책 속의 지식에 그칠 뿐이라는 사실을 교수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똑똑한 신세대들은 "돈을 버는 것은 '장사'가 아닌 결국 '돈'이다"고 규정하고 높은 월급을 주는 투자회사로 몰려갔다. 실제 돈을 벌며 현장을 뛰는 영업부서는 구직자들에겐 철저하게 기피해야 할 3D업종으로 분류된 것이다.
그런 세태를 거부한 이단아들도 없지 않았다. 당시 쉽게 선택할 수 없던 보험영업직을 택했던 한 친구는 동기 가운데 가장 빨리 비서가 딸린 널찍한 개인사무실을 얻은 직장인이 됐다. 억대 연봉은 부상이었다. 물론 적잖은 선후배 팔아 올라선 영광이었겠지만 그 누구도 그의 성공을 시샘하진 못했다. 단 한 개의 계약을 위해 그가 흘렸을 땀과 눈물의 양을 몰랐을 리 없으니 말이다.
"바로 지금 나에게는 저 한명의 고객만이, 그가 살 단 한대의 자동차가 나의 모든 것이다."(열혈장사꾼 中 하류의 나레이션)
막장드라마가 판친 2009년의 막판, 시청자들의 '은근한'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작품이 있다. <선덕여왕> <아이리스>같은 대작은 아니지만 방영된 지 4주가 지난 지금 10% 이상의 단단한 시청률과 함께 '감동을 주는 썩 괜찮은 드라마'라는 누리꾼들의 호평까지 이끌어 냈다. 바로 KBS 주말드라마인 <열혈 장사꾼>이다.
그간 <쩐의 전쟁>, <대물> 등 노골적인 스포츠신문 컨텐츠로 널리 알려진 박인권 화백(55)의 <열혈 장사꾼>이 드라마로 나오기를 기다린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주인공인 하류의 표현대로 고작 '차팔이' 얘기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공감하리라 예상한 이는 별로 없었다. 이제껏 드라마 주인공이라면 변호사, 의사 혹은 잘나가는 재벌회사의 젊은 상무였으니 말이다.
전작 <쩐의 전쟁>에서 입증된 원작의 탄탄함, 그리고 올해 '막장 드라마'의 범람이 가져온 반사 이익이라는 평도 가능하다. 이제까지 '전문직 드라마엔 전문가가 없다'라는 조롱을 비웃기라고 하듯 <열혈장사꾼>은 자동차 세일즈 세계를 드라마 속에 팔딱팔딱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 보통사람의 성공 모델은 여전히 장사
"진정한 장사꾼은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성품을 파는 것이다."(하류의 멘토 매왕)
이 표현은 이젠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됐다. IMF 이후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세일즈 세계'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이웃집 동생이 보험을 팔고, 건넛집 형님이 자동차를, 그리고 회사를 그만 둔 친누나가 학습지를 팔기 위해 공들여 회사 커피숍까지 방문하는 모습을 목도한 것이다.
때문에 자동차 전단지에 '아버지의 사진'을 인쇄해 돌리는 하류나, 자동차를 팔기 위해 술 취한 고객의 '진상'을 다 들어줘야 하는 창식의 모멸감은 드라마상의 설정으로 이해되고 끝나지 않는다. <열혈장사꾼>은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다. '땀 흘려 번 돈'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우는 불황 시대 우리 또는 이웃의 리얼리티이다.
직장생활 10년차에 접어든 친구들이 만나면 이제는 "(성공하기 위해선) 결국은 영업이야"라는 표현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장사'꾼'이란 표현이 더 이상 비하가 아니라 영광의 표현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세일즈 세계의 냉혹한 현실을 넉넉한 시각으로 풀어낸 드라마.
# 결정적 장면
시청률 10%를 넘게 한 명장면(11월1일/8회분). 경찰청 경찰차 300대 수주를 위해 하류와 거대 자동차 판매상이 격돌하는 장면이다. 하류의 태풍자동차는 실제 소비자인 일선 교통경찰의 욕구(니즈)를 파악하여 고가, 고성능 제품을 제시했다. 라이벌인 대산모터스는 값싸고 민첩한 경차로 승부를 걸었다. 결과는 노력은 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은 하류의 패배. 물론 경차를 내세운 대산의 논리(경차 경찰차가 많은 나라 범죄율이 낮다)는 허접할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국내 시장에서 외국산 자동차와 국산 자동차의 격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드라마의 결정적 장면이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