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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이 농촌으로 간 까닭은?

입력 | 2009-11-09 17:20:29

[정호재기자의 티비夜話] KBS ‘청춘불패’




KBS ‘청춘불패’ 중 한 장면

'농촌 공동화' 현상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시골에 '애 우는 소리'가 끊겼다든지 베트남 처자가 마을 이장이 됐다는 소식도 그닥 사람들의 호기심을 잡아끌지 못한다. 대규모 개발계획으로 땅값이 올라준다면 몰라도 농촌이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이 순간에도 농촌 행 버스를 고집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시청률 상위권을 싹쓸이 하는 주요 공중파 예능프로그램들이다.

얼마 전 MBC '무한도전'이 2PM과 함께한 모내기 특집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SBS '패밀리가 떴다'는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억대연봉 연예인들의 억척스러운 농촌생활기를 내보내 짭짤한 시청률 장사를 하고 있다.

● 한국식 '농촌 예능'의 탄생

KBS ‘청춘불패’ 중 한 장면.농촌예능은 이미 대세가 됐다.문제는 농촌의 현실을 너무 적나라 하게 보여준 다는 것.

'농촌예능' 붐을 일으킨 1등 공신은 KBS '1박2일'이다. '무한도전'이 농촌이란 소재를 학창시절 추억을 되살리는 '소품'이나 몸 개그의 '도구'로 활용했다면 '1박2일'은 푸짐한 시골인심에 순박한 농촌공동체 엿보기를 통해 '지역홍보' 역할까지 해냈다.

잘나가는 아이템을 복제하는 일은 방송계에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이후 우후죽순처럼 '농촌예능' 프로그램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요일 밤에 방송되는 KBS '청춘불패' 역시 요즘 가장 잘나가는 걸 그룹 막내들을 모아 '농촌예능'이란 형식을 입힌 전형적인 카피프로그램이다.

예능프로가 촬영하기 쉽고 예쁜 그림이 나오는 스튜디오를 버리고 거친 농촌을 택한 이유는 10대와 20대에게는 낯설고 40대 이상에게는 '정겨운 추억'을 건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기피의 대상이 됐던 농촌이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소재가 됐다는 점은 고무적인 변화다. 연예인 짝짓기나 운동회 수준의 고만고만한 예능프로그램이 경쟁해왔던 지난 10년간의 예능패러다임을 고려하면 이는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기 때문. 게다가 거친 농촌을 배경으로 고군분투 하는 모습은 인간적이면서도 '연예인도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공감대를 이룰 수 있어 출연자 입장에서도 플러스 요인이 된다.

'패밀리가 떴다'의 '예진 아씨'가 뜰 수 있었던 까닭도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이나 밟을 것 같은 여자 연예인이 팔딱이는 생선 목을 잡고 칼로 후려치는 일상성을 TV브라운관을 통해 날것 그대로 보여 줬기 때문이다.

● KBS예능의 또 다른 야심작? '청춘불패'

KBS ‘청춘불패’ 중 한 장면.

섹시함과 귀여움으로 승부했던 7명의 아이돌 가수들이 등장하는 '청춘불패'는 노골적인 '농촌예능'을 표방하고 나섰다. 어리광을 피울 나이인 10대 소녀들의 씩씩한 농촌생활 적응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취지다.

첫 회에서 '소녀시대'의 막내 서현은 푸닥거리는 수탉을 태연하게 잡아채어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았다. 이어 군대에서 제대한 GOD출신 김태우가 직접 삽과 거적을 들고 '푸세식 화장실'을 만들었다. 소녀 아이돌은 미니스커트가 아닌 헐렁한 몸빼 바지를 입고 사과와 콩을 따고 폐가를 수선해 숙소로 만드는 공사를 벌였다.

이들은 특기를 활용해 동네노인들 위문공연을 한다거나 알콩달콩한 서바이벌 게임까지 선보여 새로운 예능강자로 떠올랐다. 마치 10년 전 유행했던 '체험 삶의 현장'에 걸 그룹끼리의 경쟁과 협동의식을 더하는 '무한도전'의 스타일까지 차용한 모양새다.

이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원형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동한 케이블TV에서 화제가 됐던 힐튼 자매의 '심플라이프'를 언급해야 옳다. 2004년 백만장자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 작업복을 입고 농장에서 돼지 똥을 치운다는 '심플라이프1' 컨셉을 완벽히 모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농촌을 배경으로 한 서바이벌 게임?

그러나 미국의 '심플라이프'와 한국의 '농촌예능'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배경이 되는 미국 농가와 한국 농가의 빈부 차이, 그리고 현격한 세대 차이가 그것이다.

패리스 힐튼 자매가 20대의 도도한 도시 아가씨들이었다면 이와 대비되는 미국 농촌은 카우보이 복장으로 상징되는 거친 텍사스 스타일의 40대 남성 이미지였다. 이 같은 적절한 대비가 웃음과 긴장감을 유발한 것이다.

우리네 '농촌예능'은 70대 할머니와 10대 걸 그룹을 묘하게 대비 시키고 있다. MC들이 할머니들에게 "오랜만에 젊은 애들 웃음소리 들으니 좋죠?"라고 묻고 할머니들은 씁쓸한 표정이지만 제작진을 고려해 "너무 좋다"를 연발한다. 어쩔수 없이 '리얼리티 과잉'으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이들 연예인이 촬영이 없는 날에도 농촌에 상주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촌스러움을 예능으로 승화한 즐거운 프로그램이면서도 삶의 터전이 돼야 할 우리네 농촌을 자꾸만 예능의 배경으로만 사용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결정적 장면


걸그룹 막내들이 몸빼 바지 차림으로 사과밭으로 나섰다(11월 6일 3회분). 흥겨운 작업 속에 노동노래로 트로트가 나오고 새참으로 칼국수도 제공된다. 수확한 사과를 창고로 옮기는 와중에도 게임의 법칙이 작용한다. 게임을 통해 꼴등하는 이는 예능인으로는 가장 수치스러운 '통편집(출연분 전체를 삭제 당함)'의 벌칙이 주어진 것. 주어진 미션은 '사과 하나로 웃겨라'. 소녀시대 유리는 '갈갈이'처럼 사과를 입으로 갈고, 어떤 이는 사과를 손으로 쪼개는 차력쇼를 펼친다. 이 때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나르샤가 등장한다. 가슴에 사과 두개를 넣은 채 말이다. 동료들 "언니 너무 야해요"라고 기겁한다. 시청자들은 빵 터진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