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토크쇼를지향하는 KBS 미녀들의 수다
수명 다한 토크쇼의 선택은…, 의도적 논란?
한동안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방송은 영어 채널인 '아리랑TV'가 거의 유일했다. 제한적이나마 이를 통해 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이를 발 빠르게 토크쇼 형식으로 차용한 프로그램이 2006년 11월 첫 전파를 탄 KBS '미녀들의 수다'(이하 미수다)이다. 이 프로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을 출연시킨다는 원칙 이외에 미녀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택했다. 화끈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등장하는 각국 미녀들 덕분인지 '미수다'는 순식간에 장안의 화제가 됐다.
● 한국인의 열등감을 과감하게 표출
외국인에 대한 선망은 '미수다'에 등장한 금발의 백인 미녀들이 순식간에 CF스타나 유명인사 대열에 합류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미녀 에바는 드라마에 출연했고, 이탈리아인 크리스티나는 CF모델을 거쳐 역삼 빌리지 소장이 됐다. 손요(중국)와 사유리(일본), 베라(독일)는 자국에서 '미수다'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써내 양국에서 화제를 모았다. 이 벼락 스타들 가운데 뉴질랜드인 캐서린과 독일인 베라는 최근 한국사회를 비판한 인터뷰와 책 출간으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외국인에 대한 선망은 열등 의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조선족 출신 채리나 논란'은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부자 나라 교포들의 출연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시청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조선족이 등장하자 "조선족인 사실을 숨기고 출연했다면 미수다 패널로 적합하지 않다"는 논리를 내세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와중에도 '미수다'는 외국인의 시선을 통해 한국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순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아리따운 흐엉(베트남)은 "'베트남 신부, 처녀가 아니면 교환 가능'이라는 현수막을 보았다고 말했다. 메자(에티오피아)가 "취업시 면접에서 '흑인은 무조건 안된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고백했다. 시청자들은 이들의 수다에서 한국인 내면에 자리한 인종 차별 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수다가 지난 3년간 보여준 긍정적인 효과가 점차 빛을 발하고 있다.
● 수명 다한 미수다?
중국의 통러우저우는 외국인들의 자연스러운 중국어가 인상적이다. 한자 문화권이 아닌 백인과 흑인들이 천연덕스럽게 중국어를 내뱉고 태극권이나 중국 경극의 한 장면을 시연하는 모습은 제3자인 한국 사람들이 봐도 흥미롭다.
하지만 이 프로들은 '미수다'처럼 고집스럽게 "외국인이 보는 한국의 이상한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 외국인을 불러 놓고 답이 나오지 않는 '개고기 논쟁'이나 '고부 갈등'과 같은 주제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게다가 미녀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미수다'의 수명이 다했다는 지적은 2007년 말 홈쇼핑 속옷모델 출신 자밀라(우크라이나)가 출연했을 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외국인 눈에 비친 한국'이라는 '미수다'의 당초 기획 의도와는 달리 자밀라는 한국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시청률을 의식해 섹시 미녀만을 내세운다"는 비난이 제기됐고 프로그램의 선도도 갈수록 떨어졌다.
반복돼 터져 나오는 '각본설' 역시 시청자들의 흥미를 반감시켰다. 귀여운 미녀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된장찌개와 양곱창을 좋아한다'는 설정은 처음에는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이 미녀들은 스튜디오 밖에 나가서는 "대본 대로 읽어야 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미수다'는 시청률이 6%까지 추락하며 존폐기로에까지 서게 됐다.
● 미수다를 통한 때 아닌 루저 논쟁
"이! 루저(loser)야"
미국 와스프(WASP) 젊은이들에게 'Loser'란 표현이 얼마나 모욕적인 언사인지를 명쾌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톰 크루즈는 이에 이성을 잃고 즉각 여자친구를 가격하기에 이른다(서구문화에서 여자를 폭행하는 것이 얼마나 비신사적인 행위인지를 안다면 이 '루저'라는 표현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1월 9일 방송이 끝난 직후 온라인은 '미수다' 루저 논쟁으로 시끄럽다.
'미수다'의 외국인 미녀에 대응해 출연한 한국 여대생 12명 가운데 하나가 '남자 키가 작아도 사귈 수 있나?'라는 질문에 "남자 키가 180cm가 안되면 당연히 루저(loser)"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것.
문제가 된 발언이 이것 하나였다면 "영어가 짧아서"라고 관대하게 넘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 '미수다'는 막장 방송의 끝을 보여주었다. 시청률 하락에 직면한 PD와 작가들은 집요하게 막장 질문을 퍼부었고 한국 여대생들은 '사랑 없이 조건만으로 결혼 가능하다'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야 한다' '한국 여대생들이 명품을 선호하는 이유…'등 공개적으로 하기 힘든 속내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이날 방송에서 체면을 구긴 이는 누리꾼들의 '열렬한' 비난을 받고 있는 문제의 여대생 뿐만이 아니다. 당초 기획 의도를 외면하고 이국적인 미녀들을 내세워 시청률 장사를 해보려던 제작진이 진정한 '루저'였다.
# 결정적 장면
MC 남희석이 질문을 던진다. "키가 작아도 사귈 수 있느냐." 한국 여대생 2명, 외국 여성 6명이 "네"라고 답한다. 이어진 데이트 비용 관련 질문에 대해 한국 여대생은 6명은 '당연히 남자가 내야 한다'고 주장. 한 한국 여대생은 "여자가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든다"고 설명하자 이에 놀란 미르야(독일)는 "투자라뇨? 그렇게 자신들이 없냐?"라고 면박을 준다. 이어 "사랑 없이 조건만으로 결혼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는 한국 여대생의 긍정적 답변이 압도적이다. 당황한 크리스티나(이탈리아)가 특유의 마가린 발음으로 열변을 토해낸다.
"아이고 이 동생들이…아직 세상을 덜 살아봐서 그런지…, 사랑이 없으면 절대로 결혼을 못해요. 결혼할 때라도 사랑이 충만해야 해요. 그게 바로 결혼의 전제조건이에요." 일동 숙연. 시청자들 민망.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