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왜 미호가 시키는 대로 하나
요한은 미호를 위해 살인자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출처·시네마서비스
섹스를 하지만 평생 사정을 하지 않는 남자가 있다. 섹스를 나누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눈을 감지 않는 여자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몰입하지 않는다. 어딘가 다른 곳에 "밝은 미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빛과 어둠이 묘하게 교차하는 영화이다. 밝은 태양 아래 서 있지만 저 짙은 그림자가 발밑에 숨어 있는 모습과 유사하다. 굳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해보자면, '백야행'은 지독한 악몽과도 같다. 빛과 어둠이 만나면 결국 어둠이 된다는 듯이 말이다.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 포스터.
이 어둠의 한 가운데에는 요한(고수 분)이라는 인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자리 잡은 어두움의 반대편에는 미호(손예진 분)라는 밝음이 있다. 두 사람은 한 사건을 교집합으로 두고 서로 반대편 먼 거리에서 서로 응시한다. 그들이 멀리 떨어져 만나지 않는 것은 14년 전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14살에 불과했던 소년, 소녀들에게 이 약속은 절대적이다.
'백야행'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두 사람의 삶은 불면의 고통과 싸워야 하는 백야와 닮았다. 특히 요한의 삶이 그렇다. 요한은 미호를 사랑한다. 그래서 미호의 요구를 무엇이든지 들어주고자 한다.
영화 ‘백야행’ 스틸 컷
요한이 딛는 어둠은 영화 속 한 장면으로 압축된다. 요한은 동거녀와 동물처럼 격렬한 섹스를 나누지만, 절대 사정을 하지 않는다. 동거녀는 모욕감에 치를 떤다. 그런 요한에게 섹스는 욕망의 분출이 아니라 고단한 노동이자 자기 단속의 시간이다.
어쩌면 요한은 단 한 번도 욕망이라는 것을 가져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자기 욕망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 모두 미호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요한은 미호의 요구에 따라 행동한다. 십대 소녀를 강간하기도 하고, 죽이라면 죽인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사랑보다 근본적인 윤리가 그를 힘들게 한다. 그는 단 한 번이라도 태양이 밝은 대낮의 거리를 걷고 싶다고 말한다. 대낮의 거리는 표면적으로 보자면, 미호와 함께 나누는 행복한 삶이지만 다른 점에서 보자면 오로지 자신의 뜻과 욕망대로 사는 삶에 가깝다. 태양이 높게 뜨면, 그림자는 사라진다. 요한은 그녀라는 태양을 정오의 하늘로 올려 보내기 위해 그림자를 더 길게 늘이다.
미호는 요한에게 자신의 밝은 미래를 위해 누군가를 죽여달라고 한다. 사랑하는 미호를 위해 요한은 기꺼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요한은 미호를 사랑했다기 보다, '미호'라는 종교에 빠진 맹신도에 가깝다. 요한은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줄 모른다. 진정한 사랑은 그녀의 깊은 어둠을 거둬 주는 것일 테다. 하지만 요한은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어둠의 세계에 동참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그 어둠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겠다고 까지 말한다. '백야행'에서 미호라는 팜므파탈보다 요한이라는 살인자가 더 인상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광신도의 절대적 사랑으로 영화는 독특한 색깔을 입는다.
원작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는 여러 편 이런 지극히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하는 자를 위해 누군가를 죽여줄 수 있는 헌신이라고 말한다. 로맨틱하고, 강렬하다.
무릇 아름다운 여인은 위험하다. 하지만 그 여인이 정말 외모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여자는 가장 아름다운 우주적 존재가 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 속의 색(色)도 보편적 미혹이 아니라 통치자의 이성을 흔드는 주관적 미(美)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아름다움이 여러 사람을 매혹하는 미보다 더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단 한 명의 광신도는 광기조차 사랑의 계시로 오해한다. 사랑이라는 미친 종교에 빠진 남자, 요한은 매혹적이면서도 파괴적이고, 남성적이면서도 유아적인, 아이러니컬하기에 더 매력적인 남자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