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가 된 선생님
《“내가 한번 그러한 일을 한 이상에는 엇더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자는 말할 수 업스나 이후로 뎨이 김익상 뎨삼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암살을 계획하되 어대까지든지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긋치지 아니할 터이라 아모리 문화정치를 한대야 그것을 찬성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업스며 이번 일에 대하야는 조금도 뉘우침이 업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9일자》
1922년 3월 28일 오후, 중국 상하이의 세관부두에서 조선인 청년 두 명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권총으로 쏘고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총알은 빗나가고 폭탄도 불발에 그치고 만다. 경찰에 붙잡힌 두 사람 중 한 명은 신문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자신이 바로 1921년 9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범인이라는 것이었다. ‘섬약한 톄질’(1922년 4월 5일 동아일보)로 의거를 두 번이나 일으킨 이 청년은 바로 김익상(사진)이었다.
1922년 6월 30일 일본 나가사키의 재판정에 선 김익상 의사.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2년 4월 6일 동아일보에 실린 ‘김익상의 본가는 시외 공덕리로 판명’ 기사는 김익상의 집을 찾아가 취재한 그의 평소 모습을 전했다. 김익상의 주변 인물은 그에 대해 ‘키는 적고 얼골은 검으며 성질이 매우 강렬’ ‘가세는 매우 빈한’하다고 전했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세 살 난 딸이 있었다.
두 번째 거사를 함께한 오성륜이 탈옥에 성공하면서 김 의사만 혼자 일본 나가사키에서 재판을 받았다. 9월 20일 동아일보에 실린 재판 기사는 제목이 ‘민족적 견지로 당연’이었다. 기사는 “피고의 행위는 대개 조직0이라 매우 두려운 일”이라는 검사 측 주장과 “‘그 행위가 개인0이 아니오 조선독립을 도모한 바’임을 고려해야 한다”는 변호사 측 입장이 대립했다고 전했다.
1923년 11월 김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무기징역으로, 다시 20년 징역으로 감형돼 복역 21년 만에 석방됐다. 그러나 그는 귀향 직후 종적을 감췄다.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살해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김익상 의사가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것은 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으로 옮기기 전으로 현재의 서울 중구 예장동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인근이다. 이곳에는 현재 김 의사의 뜻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김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