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를 쓰러뜨린 3발은
죽음의 윤리에 사로잡혀 있던
근대 일본 허구성 폭로한
생명 윤리의 외침이었다”
안중근을 일본 제국주의의 박해받는 선지자이자 일본인의 각성을 가져온 구원자로서 형상화한 연극 ‘겨울꽃’. 사진 제공 스튜디오 반
연극은 이토를 암살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뒤 뤼순감옥에 투옥된 안중근(방윤철)을 향한 일본인의 시각에서 펼쳐진다. 그들에게 안중근은 불가사의한 존재다. 일본의 정계 원로를 쓰러뜨린 흉악범이지만 논리정연하기 이를 데 없고, 죽음의 문제에 너무 초연하기 때문이다. 극 초반 안중근은 소리와 그림자로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에게 호기심과 두려움, 내면의 갈등과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이들 4인의 팽팽한 긴장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안중근을 감시하기 위해 그의 독방 곁에 붙여둔 모범수 다카키(허인범)가 ‘쿵, 쿵쿵’ 하는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며 공포에 질려 자살한 것이다. 안중근은 그 소리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라고 말한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구즈노키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려온다.
안중근은 그 소리에 평온함을 유지하지만 구즈노키를 비롯한 일본인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총소리를 닮은 그 소리로 인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구로키 국장은 “현대는 강한 자만이 전부를 지배하는 시대, 즉 약자인 자체가 죄가 되는 시대”라며 그런 현상을 ‘피해망상’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아버지가 살해된 미야타는 이에 맞서 강함을 곧 정의로 규정하는 일본제국주의의 윤리적 허약성을 비난한다.
구즈노키는 그런 근대 일본이 초래한 ‘죽음의 윤리’에 사로잡힌 희생양이다. 그의 형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서 전사했고 그 형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자살을 기도했다가 광기에 사로잡혔다. 안중근은 처형되기 직전 그런 구즈노키에게 그 소리는 죽음의 소리가 아니라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들은 심장박동 소리, 곧 생명의 소리임을 일깨워준다.
그 순간 안중근이 이토를 향해 쏜 총성 세 발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근대 일본이 사로잡혀 있던 ‘죽음의 윤리’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새로운 ‘생명의 윤리’를 쓰기 위한 역설의 저항이었음이.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