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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재기자의티비夜話] ‘루저의 난’으로 다시 주목 받은 KBS 개콘 ‘남보원’

입력 | 2009-11-17 03:00:00


남보원의 인기는 세태의 변화와 연관이 크다.

아직도 '남보원'을 흘러간 코미디언의 이름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요즘 남보원이란 '남성인권보장위원회'의 줄임말로 매주 일요일 밤 방영되는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이다. 남보원은 가벼운 슬랩스틱이나 말장난이 개그 프로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드물게 시사성을 띤다. 최신 사회 현상을 유머 코드로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KBS '미녀들의 수다'가 이른바 '루저의 난'을 일으킨 직후인 11월 15일(일) 방영분은 방송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개그 소재로 남성의 '키'나 혹은 '루저'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남보원 이외에는 속 시원하게 대변할 사람이 없다"는 '루저'들의 하소연도 줄을 이었다.

● 시대에 지친 남성들을 위로?

남보원이 2030시청자들에게 확실한 웃음박스로 떠오른 이유는 개그소재 자체가 대단히 전복적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공개적 발언이 금기시 됐던 '여성에 치인 남성'을 웃음의 직접 소재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그 대상을 직장이나 사회로 무한히 확장하지 않고 '20, 30대의 연애과정'으로 제한하는 똑똑한 전략을 구사한다. 남보원이 내건 공식 캐치 프레이즈 '여성이 밥값을 내는 그날까지'를 보면 코너의 컨셉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출연진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부르짖으며 방청객의 호응을 유도한다.

"영화표는 내가 샀다! 팝콘값은 니가 내라!"
"니 생일엔 명품가방, 내 생일엔 십자수냐?"
"초콜릿 복근 웬말이냐! 우리에겐 카라있다"

남보원 등장 이후 한동안 온라인에서는 '소개팅 시 밥값을 누가 내야 하는지'가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이 문제는 남성 누리꾼들에 힘입어 웬만해선 '지갑 안 여는 여성'들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고, 개인적인 경험담도 줄을 이었다.

20대 뜨거운 청춘들이 겨우 소개팅비 부담 논쟁이나 벌이냐고? 천말에 말씀. 요즘 연애 물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두 명의 남녀가 커피 전문점에서 만나 스파게티를 먹고 영화를 감상한 뒤, 맥주한잔하고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은 최소 10만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코스만 살짝 업그레이드해도 총 비용은 두 배가 되고, 일주일에 4번 데이트 한다면 연애 비용은 '88만원 세대'의 한 달 치 월급에 육박한다.

이런 시점에 '루저의 난'이 터진 것이다. '키 180cm 발언'에 가려서 그렇지 당시 미수다에는 "데이트 비용은 당연히 남자가 내야 하는가"라는 민감한 문제도 제기됐다. 한국 미녀들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여기에는 여성들이 외모를 꾸미는데 이미 많은 돈을 '투자'했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논리까지 따라붙었다.

● 남보원이 각광받는 슬픈 시대

실제로 차가 없으면 연애가 힘들고, 억대를 훌쩍 넘는 전셋집 하나 구하지 못하면 수도권에서의 결혼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반해 일부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더 많은 돈을 저축하고 있지만 결코 데이트 장소에서는 지갑을 열지 않는다. '남성이 돈을 내야 한다'는 전통적 가치관이 '남녀가 (상당히) 평등해진 현실'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상당수 남성 시청자들에게 남보원은 개그라기보다 치열한 삶의 진실에 가깝다. 지금도 각종 게시판에는 '돈 없고, 빽 없고, 키 작고, 차 없고, 노래 못 부르고, 옷 잘 못 입고, 능력 없고, 재미없는 남자들'은 어떻게 연애해서 결혼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남보원이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남자들의 열악한 인권 실태'를 전달하는 개그맨들의 드레스 코드가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운동권 코드다.

개콘의 최장수 최고령 멤버인 박성호(35)는 대중들에게 '간달프'로 통하는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의 분장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어 '황현희 PD의 소비자고발'로 널리 알려진 황현희(29)는 노조 간부로 보이는 붉은 조끼와 머리띠를 동여맸다. 마지막으로 최근 행복전도사로 이름을 날린 최효종(23)은 노타이 차림의 편안한 정장에 시위현장이나 야구장 응원에 등장할법한 커다란 북을 들고 나섰다. 한 마디로 이들은 여성 시청자들을 상대로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386을 상징하는 '시위 코드'는 개그코너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다(따지고 보면 그 선두주자도 개그맨 박성호였다). 하지만 개그 프로에서 시위라는 형식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용된 전례는 없었다. 그것도 시위의 목적이 '남성 인권 보장'이란다. '영화표는 내가 샀다! 팝콘값은 니가 내라!'처럼 잣수를 맞춰 뽑아내는 구호들은 강렬하고도 씁쓸한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이번 주 방송에서 '루저' 얘기는 등장하지 않았다. 녹화가 수요일이었기 때문에 전날부터 논란이 된 소재를 빠르게 활용하지 못했던 탓일 게다. 게다가 미수다는 KBS 간판 예능 프로였다. 같은 방송사 프로그램을 유머의 소재로 삼아달라고 기대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일까.


#결정적 장면.


"우리는 떨어진 남성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나온 남보원입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발언을 시작한 3인방은 첫 번째 주제로 '노래방 인권'을, 두 번째 안건으로 '데이트 귀가 차별'을 역설했다. 남자가 여성을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은 신사도의 기본일진데 뭐가 문제일까? 황현희가 부르짖는다. "택시타고 갈거라면, 할증 전에 타고가자". 이어 '차 없는 남성'에 대한 설움이 이어졌다. "사실 차가 있으면 그 순간 대리기사, 없으면 찌질이라고 구박". 박성호는 이렇게 결론 낸다. "여성 여러분 남자친구들 골라 사귀어서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