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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축구

입력 | 2009-11-25 03:00:00


《“운동을 질겨하는 청년들은 겨울동안 길넛든 기운을 다시 고무하야 장쾌한 경기를 하고자 활기가 충만하도다. 이 때를 당하야 조선 톄육회(體育會) 주최 본사 후원으로 뎨이회(第二回) 전조선 축구대회를 경성에서 개최하게 되엿다.” ―동아일보 1922년 1월 30일자》

英해군이 ‘풋뽈’ 전파
배재학당서 최초 창단
1929년 첫 경평전 열려


 1924년 11월 제3회 전조선 축구대회를 구경하려고 모인 인파(위)와 경기 장면.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국에 처음 축구를 전파한 사람들은 19세기 말 영국 군함 승무원들로 알려졌다. 이후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이 축구 보급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02년 배재학당에 축구부가 생긴 뒤 1903년 한성기독교청년회, 1906년 대한체육구락부 등에 잇따라 축구단이 조직됐다.

국내 축구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들어서다. 1920년 동아일보 스포츠난에는 중앙학교 대 동명고, 평양단 대 숭실학교, 대구 계성학교 대 마산 창신학교 등이 펼친 ‘풋뽈’ 경기 소식이 매달 3∼10건 실렸다.

1920년 7월 고원훈 등 70여 명의 발기로 조선체육회가 조직됐다. 며칠 뒤 조선체육회 주선, 조선청년회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도쿄 한국 유학생회 축구단의 모국방문 경기가 열렸다. ‘휘문과 배재교뎡에서 축구’ ‘오대 영점으로 도쿄군, 청년회에게 대패…축구전만은 운동계의 모범’ 등 기사가 5일간 이어졌다.

1921년 한국 최초로 열린 전조선 축구대회에는 배재, 경신, 보성, 휘문 등 사립학교 팀과 건강구락부, 불교청년회 같은 클럽 팀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1933년까지 계속됐다. 1922년 11월 26일 동아일보는 제2회 전조선 축구대회 결승전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용감스런 운동군의 기개라. 엇지 여간 오는 눈을 두려워하리오. 오전 아홉시 정각부터 운동장에 모히어 선수 일동과 응원단이 일제히 눈을 치는 것도 한 장관을 이루엇다.”

1926년 4월 일본 오사카구락부가 한국을 방문했고 10월에는 조선 대표 격인 조선축구단이 해외 원정에 나섰다. 조선축구단은 도쿄에서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 등과 겨뤄 8전 5승 3무로 무패 기록을 달성했다. 동아일보 1928년 2월 3일자에는 조선축구단 김원태 주장이 ‘상하이 원정기’를 실었다.

1926년 조선전문학교축구연맹(현 대학연맹)이 발족해 경성제대, 연희전문, 보성전문, 수원 고등농림학교 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28년 대한축구협회(KFA)의 모체인 조선심판협회가 조직됐고 1929년에는 축구 경평전(경성 대 평양)이 시작됐다.

1938년 일제는 조선체육회를 해체했다. 이어 1942년에는 조선체육진흥회를 세워 조선축구협회를 흡수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축구협회는 이에 불복하고 서울 반도호텔에서 자체 해산했다.

광복 후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해 헝가리에 0 대 9, 터키에 0 대 7로 대패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뒤 한국 축구는 기적을 이뤄냈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한 월드컵에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강팀을 무찌르고 4강에 진출했다. 지난달 열린 청소년(U-20) 월드컵에서도 한국은 8강 진출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