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미소’에 무뚝뚝한 바위도
뒷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미메시스 아트하우스의 모습은 정문 밖에서 보는 반대편 모습과 대조적이다(위 사진). 뒷마당 바위 언덕을 둘러싼 형태의 건물 내부 곳곳에는 시선을 붙드는 아기자기한 풍경들이 숨어 있다. 손택균 기자
“자연과 인간은 하나” 소리없는 외침 담아
두 채의 집이 있던 1098m² 넓이의 넉넉한 땅에 세운 지하 2층, 지상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 지난달 29일 오전 찾아간 이 집의 외형은 주변 건물에 비해 언뜻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송판 거푸집의 나뭇결을 살린 남쪽 출입구 주변 노출콘크리트 담장은 김 교수의 털털한 웃음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간결한 입면 외피 뒤편에는 치밀한 짜임새의 디테일이 숨어 있었다.
출입구에서 바로 이은 뒷마당, 계단 끝에서 만나는 옥상 정원을 통해 이 건물은 외부로 한껏 열려 있다. 복도와 계단 곳곳에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기대 쉴 아기자기한 ‘골목 풍경’이 있다. 은근히 비틀린 각 실의 배치는 공간 한복판에 품은 바위언덕으로부터 얻었다.
복잡한 듯하면서도 간결한 공간의 중첩은 김 교수가 밟아온 삶의 궤적을 닮았다. 그는 20세 때 부모와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 상파울루 마켄지대에서 도시건축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진로를 바꿔 미국 뉴욕대 영화과에 들어갔다가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프랫인스티튜트 건축과에 편입했다.
“브라질 대학의 건축 수업은 인문학적 주제를 자유로운 방법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공간 탐구에 얽매이지 않았죠. 8mm 캠코더로 작업을 자주 하다가 영화 공부에 눈을 돌린 겁니다. 하지만 뭣에든 몰입해 본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필름으로 풀어낼 이야기를 찾는 데 한계를 느꼈어요. 일단 건축을 좀 더 파고든 다음 영화로 돌아가려 했는데…. 지금은 영화 DVD 수집하는 취미만 남았습니다.”(웃음)
풀죽어 돌아간 건축의 길에는 세기의 모더니즘 건축 거장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살아 포르투갈어를 한 까닭에 컬럼비아대학원 시절 알바루 시자 포르투갈 포르투대 교수(76) 관련 연구를 맡게 된 것. 고유한 문화를 중시하는 지역주의 건축에 골몰하던 그는 시자 교수의 작품세계에 반해 휴학계를 내고 무작정 포르투갈 사무실로 찾아갔다.
문의전화 한 통도 않고 유럽으로 떠난 건 무모한 객기가 아니었을까. 김 교수는 “젊었을 땐데 겁날 게 뭐가 있었겠느냐”고 답했다.
“10여 년을 머뭇거림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떠돌며 살았습니다.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정보가 많아서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 같아요. 세상이 현실적으로 변해서 이상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어 보이죠? 하지만 너무 지레 겁먹는 것 아닐까요. 꿈에 대한 의지가 있고 나서야 정보의 쓸모도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1991년 귀국할 때도 고민이 없었다. 갤러리 초대전에 참여하려 들렀다가 이것저것 작업이 많아져 그냥 눌러앉았다. 김종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함께 진행한 헤이리 아트밸리 마스터플랜, 한길 북하우스와 갤러리, 열린책들 옛 사옥 등이 차례차례 빚어졌다. 영화에 대한 옛 열망은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의 멀티플렉스 ‘아트레온’(2003년)에 녹아들었다.
민현식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그의 건축에 대해 “시간을 탐구하는 실존의 공간”이라고 평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토박이가 얼떨결에 남미, 미국, 유럽을 15년 동안 떠돌고 나서 얻어낸 건축. 얼핏 일관된 흐름이 없어 보이지만 자연과 섞이며 간결하게 덜어내려 한 의지는 오롯이 통해 있다.
“건축가와 건설회사가 대단지 아파트를 짓기 위해 협업한 사례는 거의 없었죠. 건축과 건설이 서로를 멀리하는 관습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들어가 살 사람이 더 좋은 공간을 가질 수 있으면 그만인 거죠.”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 김준성 교수는
변영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