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가지 한약재로 빚은 ‘담양의 1000년 명주’
엿기름 3근, 물 3말, 미지근한 물로 갠 누룩 11근에 두충, 창출, 육계, 독활 따위를 한 근 반씩 넣고….’
전남 담양군 용면 추월산 자락에 자리한 ‘추성고을.’
‘추성주(秋成酒)’로 불리는 전통주 제조 기법이다. 양 씨 증조할아버지가 족자에 300여 한자로 써 놓은 것을 할아버지가 한글로 풀어 쓴 것이다. 4대에 걸쳐 내려오는 ‘원본’과 ‘번역본’은 양씨 집안이 가장 중히 여기는 가보(家寶)다.
추성은 담양의 옛 이름이다. 추성주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부터 고려 성종 때까지 250여 년간 추성군으로 불린 담양의 지명에서 따왔다. 술은 추월산 인근 천년고찰인 연동사(煙洞寺)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1796년 담양부사 이석희는 이곳 풍물을 소개한 ‘추성지’에 ‘연동사 스님들이 절 주변에서 자라는 갈근, 두충, 오미자 등 갖가지 약초와 보리, 쌀을 원료로 술을 빚어 곡차로 마셨다’는 고려 문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를 지낸 이영간의 증언을 적고 있다. 술맛이 어찌나 좋았던지 ‘마시면 신선이 된다’고 해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로 불렸다는 내용도 있다.
‘추성고을’ 양대수 대표가 양조장 내 발효실에서 누룩과 분쇄한 약초를 넣어 섞고 있다. 12가지 한약재가 들어가는 추성주는 대나무 숯으로 걸러내기 때문에 뒷맛이 깔끔하다. 담양=박영철 기자
추성주의 독특한 맛과 향의 비밀은 발효와 숙성 과정에 있다. 제조 과정은 이렇다. 잘 씻은 쌀로 고두밥을 지은 후 누룩과 분쇄한 약초를 넣어 잘 섞는다. 다시 술덧(술밑)에서 15일 이상 저온 발효시킨 후 술지게미(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를 없앤다. 이어 술덧을 증류기에서 서서히 빼내면 특유의 향미가 나는 원주(배합·출하 공정 이전의 술)가 생긴다. 이를 다시 가라앉히고 대나무 숯으로 걸러내면 추성주가 만들어진다.
전통 비법에는 20여 가지 한약재가 들어간다고 돼 있지만 지금은 12가지만 사용한다. 독활, 강활 등이 식품 첨가 규제 약제여서 쓰지 않고 있다. 대량생산을 위해 현대식 설비를 갖췄지만 제조방법은 예전과 똑같다.
“추성주는 한약재가 첨가되기 때문에 술을 빚는 과정이 까다로워요. 한약재 특성에 따라 달이거나 찌고 볶는 방식이 제각각이거든요.” 약재를 다루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추성주를 빚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2년 가까이 약재 연구에 매달렸다.
“대학과 연구기관, 한약방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구기자와 갈근 등은 달이고, 오미자와 우슬 등은 볶고, 연뿌리는 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죠.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더군요.”
양 씨는 술을 빚어 주위 사람들에게 맛을 보였다. 하지만 ‘술이 싱겁다’, ‘냄새가 난다’는 등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숙성과정을 조절하고 약초를 줄이는 등 비방을 다듬은 끝에 2000년 국내 22번째 ‘전통식품 명인’으로 지정받았다.
‘추성고을’에는 담양의 명물 대나무로 만든 ‘댓잎술’도 있다. 추성주를 빚는 과정에서 나오는 증류수에 댓잎을 넣어 만든 12도짜리 발효주로 젊은층에게 인기다. 양 씨는 “요즘 우리 술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데 희망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담양=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