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귀신의 재주” 1925년 경성 첫 전파 일제 선전수단 활용
《“뎐화긔계는 줄이 잇스닛가 뎐긔의 힘으로 사람의 말이 그 줄을 통하야 들닌다 하겠지마는 아모 줄도 없시 긔계 하나만 놋코 안젓스면 몃천리 밧게서 나는 긔긔묘묘한 소리가 다 들닌다는 것은 참으로 귀신의 재조가 아닌가.” (동아일보 1922년 5월 24일자)》
1930년대에 인기를 끈 일제 내셔널 라디오. 당시 라디오는 덩치가 커서 그 안에 사람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 어린이들이 말을 걸기도 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5년 경성체신국에서 라디오 시험 전파를 발사했다. 이해 11월 동아일보 부산지국이 ‘삼남 라디오 순회대’를 조직한 것을 시작으로 대구 개성 등 지국이 잇달아 공개 청취회를 열었다. “천애(天涯)에서 오는 묘음(妙音)은 족히 일석의 흥치를 적(籍)하겟슴”(1926년 2월 28일 동아일보)이라고 전했다.
1933년에는 ‘이중방송’이 실시됐다. 일본어 조선어 시간을 나누어 방송하다 조선어 채널을 별도 분리한 것이다. 이후 청취자 수는 1936년 8월 5만9000명, 1938년 11월 12만3000명으로 급증했다.
초기 프로그램은 뉴스, 음악, 소설낭독 위주였다. 1930년대엔 라디오 드라마라는 새 장르가 인기를 끌었다. 1933년 10월 1일 동아일보에는 한 드라마 작가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넌센스’와 에로, 그로(에로틱, 그로테스크)의 혼합주(混合酒)면은 대중은 오케이일 것이다. … 하지만 나는 이러한 저급취미에 아부하고저 노력할 아무런 의무와 양심을 갖추지 못했다.”
방송의 부실함을 지적하는 칼럼도 동아일보에 실렸다. “라디오 프로를 주시하건대 너무도 빈약함이 눈에 뜨인다. 이는 이 반관립(半官立)인 방송이 너무도 어용화하야 진부하고 소극적인 것을 도리어 장려하고 잇는 것이 최대 원인이오….”(1935년 10월 22일)
1936년 이후 조선어 방송은 쇠락했다. 일제가 선전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어 방송 비율을 늘렸기 때문이다. 광복 후인 1947년에는 경성방송국의 인력과 설비를 이어받은 서울중앙방송국이 탄생했고 이는 KBS의 모체가 됐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