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로 민족에 봉사” ‘판타지 코레아’ 작곡 조선인 자부심 알려
《“안익태 씨는 금년 여름 헝가리 부다페스트 방송국에서 자작의 ‘심포니크 판타지 코레아(조선환상교향곡)’를 ‘컨덕(conduct)’하여 구주 전국에 중계방송하엿는데…안 씨가 특히 서구음악가 사이에 높이 평가되는 것은 조선독특의 멜로디를 살려 서구인이 잘 표현할 수 없던 동양적인 정서를 예술적으로 완성해낸 점이다.” ―동아일보 1938년 12월 11일자》
세계적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서 작곡과 지휘를 배우던 1930년대의 안익태(오른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신시내티와 필라델피아에서 첼리스트로 명성을 날린 그는 193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거장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에게 지휘를 배웠다. 이후 헝가리 부다페스트,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체코 프라하, 아일랜드 더블린, 독일 베를린 등 각지에서 지휘요청이 쇄도하자 유럽에 정착하게 된다. 1947년부터 10년간 안익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교류하며 세계적인 악단의 지휘자로 높은 명성을 쌓았다.
1939년 1월 3일자 동아일보 ‘약동하는 조선 멜로디! 자작한 조선환상교향곡을 구미각지에서 연주 방송, 첼리스트·컨덕터 안익태 씨의 신기’ 기사는 암울했던 일제 말기 조선인의 자부심을 세계에 알린 그의 활약상을 대대적으로 전했다. 기사는 “이 ‘조선환상교향곡’은 조선의 방대한 역사를 주제로 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안익태에게 음악이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1936년 신한민보 인터뷰에서 “신작 애국가가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도우는 데 다대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1934년 4월 18일 동아일보에 그가 직접 쓴 기고문에서도 그는 “조선청년은 타국인과 판이한 입장에 있는 것과 동포에게 중대한 의무가 있다”며 “개인으로 유의미한 생애를 지내고 아울러 동포에게 유효한 봉사를 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안익태는 광복 후 1955년 3월 18일 2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그를 보러 온 5만 명의 관중은 안익태의 지휘로 ‘애국가’를 목청껏 불렀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