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 정여창 선생의 16대손 며느리인 박흥선 명인이 소줏고리에서 나온 지리산 솔송주를 맛보고 있다. 박 명인은 술을 전혀 못하지만 혀끝의 감각으로 솔송주의 품질을 가늠할 수 있다. 함양=최재호 기자
청정 암반수… 깊은 솔향… ‘지리산의 술’
또 하나. 늘 푸르고 꼿꼿한 소나무와 선비의 절개를 닮은 명주가 500년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 정 선생 가문에서 500년째 내려오는 가양주(家釀酒)인 ‘지리산 솔송주’다.
솔송주의 맥을 유일하게 지켜오고 있는 박흥선 씨(57·전통식품명인 27호)는 정 선생의 16대손 며느리이다. 33년 전 개평마을에 시집을 와서 시어머니에게 술 빚는 법을 배웠다. 100세인 시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요즘엔 박 명인 혼자 맡고 있다.
“처음 시집왔을 땐 누룩 냄새를 맡지도 못했어요. 30년 넘게 술을 빚어왔지만 술은 한잔도 못 비워요. ‘이런 내가 가문의 술을 빚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지만 가양주의 맥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제조법을 배웠습니다.”
술은 못하지만 혀끝으로 술이 잘 빚어졌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남편 정천상 씨(63)의 도움도 컸다. 정 씨는 20대 초반 총각 시절부터 맛본 솔송주에 대한 절대미각이 있다. 그의 기억으로는 솔송주 한잔을 맛보기 위해 전국에서 개평마을을 찾은 주당 나그네가 엄청났다고 한다.
지금 솔송주가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엔 술 이름이 ‘송순주(松荀酒)’였다는 점. 박 명인이 1996년 주조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타 지역에서 먼저 등록한 송순주와의 중복을 막기 위해 한글로 풀어 솔송주라고 이름 붙였다.
발효과정에서 남은 당분(잔당)을 조절하는 건 박 명인만의 비법이다. 당분이 없으면 독한 술이 되고 너무 많으면 고유의 술맛이 사라진다. 솔향 가득한 술은 이렇게 후손의 손끝에서 가문의 명예를 지켜왔다.
여느 술 빚는 사람처럼 박 명인도 발효와 숙성을 중요시 한다. 날씨와 온도에 따라 숙성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운다. “발효는 하늘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술을 빚는 과정에서 기도를 많이 드립니다.” 가톨릭 신자인 박 명인은 술 빚는 과정이 기도의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솔송주는 이름을 닮은 맛을 낸다. 진한 솔향이 먼저 코끝을 파고든다. 도수가 높지만 달짝지근한 맛에 목 넘김이 부드럽다. 뒤끝이 깨끗한 게 특징이다.
전통을 간직한 노력 덕분에 솔송주는 지난해 경남 창원시에서 열린 환경 올림픽인 ‘2008 람사르 총회’에서 공식 건배주로 채택됐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북한 방문 때 남측이 내놓은 공식 만찬주 가운데 하나였다.
함양=윤희각 기자 to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