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운동이 독립운동”이광수 주요한 홍명희…조선 인재들의 저수지
1920년 동아일보 화동 사옥 내 편집국 풍경.
《“추송(秋松) 장(張)형은 당년이 삼십이라. 형용은 준수하고 체질은 유약하되 활발한 기개와 맹렬한 담력은 인(人)의 의기를 압(壓)하며 … 장덕준형은 본사의 특파원으로 작년 10월경에 간도방면의 험악한 형세를 조사키 위하야 출장하얏다가 행방이 불명하야 탐지할 도(道)가 두절되다.”
― 동아일보 1921년 2월 22일자》
일제강점기 민간 신문사는 조선 인재들의 저수지였다. 총독부 관리가 되는 것 외엔 출사(出仕)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뜻있고 재주 있는 이들이 뜻을 펼칠 출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송 장덕준과 설산 장덕수 형제는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송은 1920년 11월 만주 일대 조선인 학살현장을 취재하다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순직기자가 됐다. 여운형, 김규식과 신한청년단을 창단한 그의 동생 설산은 동아일보 창간사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를 쓴 이후 줄곧 동아일보 지면을 수놓은 주요 필자였으나 1947년 12월 해방정국에서 동족의 손에 암살당했다.
일제강점기 기자 중엔 특히 문인이 많았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발표한 춘원 이광수와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지은 송아 주요한,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쓴 빙허 현진건은 사회부장을 지냈고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발표한 시인 김억, ‘상록수’의 저자 심훈, ‘국경의 밤’의 시인 김동환, ‘레디메이드 인생’의 채만식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조선일보에서는 ‘운현궁의 봄’을 쓴 김동인이 학예부장을 지냈고 수필 ‘청춘예찬’으로 유명한 민태원은 1924년 편집국장을 지냈다.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 ‘사슴’의 백석도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다.
모더니즘 시인이었던 김기림은 1940년 8월 조선일보 폐간 당시 학예부장이었다. 그의 시 ‘편집국의 오후 한시 반’은 그가 경험했던 신문사의 인상을 고스란히 전한다. “편집국의 오후/한시 반/모-든 손가락이 푸른 원고지에 육박한다 … 째륵/째륵/철컥/공장에서는/활자의 비명-/사회부장의 귀는 일흔 두 개다/젊은 견습기자의 손끗은/조희(종이) 우흐로 만주의 전쟁을 달린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