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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공진회와 박람회

입력 | 2009-12-17 03:00:00

“상업행사로 세수 증대”
조선상인은 제외 일쑤
관람객 몰려 사고 빈발



1922년 4월 7일 경성 장곡천정(현 서울 중구 소공동)에서 열린 곡물공진회. 동아일보 자료 사진


《“몸을 부비며 남의 시계와 지갑을 빼아서 가는 ‘스리’로 말하면 조선에는 업든 것이요 대정5년(1916년)에 경성에서 공진회(共進會)를 할 때에 일본으로부터 드러와서 전파하얏다는대….”

―동아일보 1922년 10월 26일자》
일제강점기 공진회는 ‘각종 산물과 제품을 한곳에 모아놓고 품평하는 모임’을 뜻했다. 위 기사가 언급한 경성 ‘물산(物産) 공진회’는 총독부가 경복궁 흥례문(興禮門)의 주변 시설을 철거하고 훼손하는 데 빌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10여 년 전만 해도 이 단어의 의미는 사뭇 달랐다.

1904년의 공진회는 대한제국 부보상(負褓商·등짐봇짐장수)들이 조직한 사회운동 단체를 뜻했다. 1897년부터는 황국협회가 이를 관장했다. 1898년 부보상들은 황국협회 지시에 따라 독립협회의 자주 국정개혁 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와해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후신인 상민회(商民會)는 친일 성향 회원을 솎아내고 1904년 진명회(進明會)로 이름을 바꿨다. 그해 12월 다시 바꾼 명칭이 공진회였다. 3년 뒤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이준이 회장을 맡았다. 그 후 공진회는 이준이 경무청에 구속되고 사무실이 폐쇄되는 등 탄압을 받다가 1905년 해산됐다.

공진회는 이후 대규모 상업 행사를 뜻하는 단어로 의미가 바뀌었다. 1920년대엔 임업공진회, 산란(産卵)공진회, 퇴비공진회까지 수많은 공진회가 이어졌다. 일제는 지역 경제를 일으켜 세수를 늘리고 볼거리를 제공해 불만을 무마하고자 공진회를 장려했다. 공진회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에게 철도 요금을 할인해주기도 했다. 지역 주민회나 청년회가 나서서 주민들이 함께 공진회 구경을 가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 행사에서 조선 상인은 소외되기 일쑤였다. 행사를 보러 온 조선인의 모임은 감시 대상이 됐다. 1923년 9월 28일 동아일보는 ‘약차하면 일천의 패검(佩劒)이 일제히 출동하도록 한’ 부업(副業)공진회 경계방침을 전하며 “누구를 위하야 하는 경계?”라고 꼬집었다. 인파가 몰리면서 사고도 빈발했다. 1927년 4월 13일 동아일보는 ‘진해의 대참사-발동기선 돌연 전복, 승객 80명 조난’ 기사를 전했다. 기선회사가 공진회 관람객 유치 경쟁을 벌인 끝에 적정인원을 넘는 승객을 태운 것이 사고 원인이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였던 당시는 세계적으로 박람회(엑스포)가 성행했다. 일본 도쿄와 미국 뉴욕 등에서 전해진 이들 행사 소식이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1922년 5월 4일 동아일보에는 ‘도쿄 평화박람회’를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일제가 설치한 조선관이 “험상한 조선 농군의 인형을 아모초록 보기 실토록 만드러서 세여노은 괴악망측한 뎐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것이다.

189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국가전시관을 열었던 한국은 1962년 미국 시애틀 박람회에 참가하면서 세계박람회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1993년 참가 100년 기념으로 열린 대전엑스포는 세계박람회기구(BIE)가 당시 개발도상국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공인한 세계박람회였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