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꼭대기에 도착하매 천지(天池)의 물빛이 쪽보다도 더욱 푸르고 거울보다도 더욱 고요하여 창공에 배회하는 백운(白雲)의 그림자와 전후좌우에 삼엄하게 버텨선 고봉준령(高峰峻嶺)의 머리가 그 속에 비치어 그 아름다운 경치는 그릴 수 없으며 그 장엄한 풍경은 오직 감격을 일으킬 뿐이었다.”
―1921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 1면》
1920년대 초 국내에 전해진 백두산 상상봉 주변 풍경. 동아일보 자료 사진
“민족영산에 올라보자” 1면에 17회 르포 실어
육당도 근참기 연재
약 100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생긴 백두산은 해발 2744m인 한반도의 최고봉이다. 백두산은 한반도 여러 산의 근원이 되는 백두대간이 시작되는 곳이며,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인 압록강과 두만강이 발원하는 민족의 영산이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강점기에 백두산은 민족혼의 상징이었다. 동아일보는 1921년 8월 백두산에 탐험대를 보냈다. 단순한 등산이나 탐험의 의미가 아니라 ‘단군 탄강(誕降)’의 성지요 ‘근역(槿域) 산하의 조종(祖宗)’으로 전승돼 온 백두산을 민중의 의식 속에 널리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백두산 탐험대에는 사회부 기자였던 소설가 민태원(1894∼1935)과 사진반이 파견됐다. 이들은 8월 13일 삼지연 언덕에 노숙한 뒤 16일에 천지(天池)가에 닿았다. 당시 기사는 ‘우리 손으로 백두산을 사진 박은 것은 처음 일’이라고 밝혔다. 백두산 정상에는 ‘대한독립군기념’이라는 문구를 새긴 비석들이 있었다고 전해 산악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의 활약상을 증언했다. ‘백두산행’ 르포 기사는 17회에 걸쳐 신문 1면에 연재됐고 백두산 관련 강연회와 사진전도 열렸다.
육당 최남선은 1926년 백두산을 직접 등정해 7월 28일부터 동아일보에 ‘백두산 근참기’를 연재했다. 이듬해 1월까지 89회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연재 계기는 일제의 단군 깎아내리기였다. 1926년 2월 한 경성제대 교수는 조선교육협회 기관지 ‘문교(文敎)의 조선’에 논문을 기고해 단군을 ‘전설’로 비하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설은 논문 이면에 일제의 조선정신 말살 기도가 숨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후 최남선이 동아일보에 77회나 ‘단군론’을 연재한 뒤 ‘백두산 근참’에 나선 것이다. 이 글은 필체가 웅건할 뿐 아니라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학술적 고증도 담아 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른다. 과거 여진족들도 백두산을 그들의 조상의 발상지라 믿어 금나라, 청나라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중국은 2005년부터 ‘장백산보호개발관리위원회’를 설치해 백두산 관광개발에 나서고, 장백산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 하고 있다. 백두산 천지는 1962년 북한과 중국이 ‘조중변계조약’을 맺은 이후 중국과 북한의 영토로 양분된 상태다. 우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온전히 지키는 일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