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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범죄

입력 | 2009-12-25 03:00:00

금고 열곤 “너무 많다”
돈 남기고간 절도범 등
생계형 범죄가 많아



1933년 6월 ‘목 없는 영아’ 사건의 범인이 밝혀지자 분노한 주민들이 범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서대문 밧 현저동에 잇는 서대문감옥에는 … 임의(이미) 형긔가 결뎡되어 복역하는 죄수가 남자가 일천오백십사명이오 여자가 구십오명인대 남자죄수의 범죄는 절도 사백칠십륙명이 가장 만흔대 그 원인은 대개 생활 곤난으로 할 수 업시 절도짓을 한 것이요 그 다음은 강도가 삼백여명인대….”

―동아일보 1923년 2월 26일자》
1921년 일제의 한 경찰관은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조선인의 범죄에 대한 특y(特點)을 말하자면 그 내용이 단순하니 곳 교묘한 범죄와 보통사람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가 없시 복잡하게 꿈인 일은 별로히 업다고 하야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한국에서의 범죄는 사기 등 경제사범이 많은 일본인들의 범죄에 비해 생활범죄가 많고 수법은 대부분 순진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 전체를 경악하게 한 대형 범죄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1933년 5월 16일 일어난 ‘목 없는 아이’ 사건은 미신의 영향을 짙게 받던 당시 조선의 우울한 초상을 드러냈다. 이날 서울 중림동의 쓰레기 처리장에서 유아의 머리가 발견된 데 이어 21일 만에 한 묘지에서 아이의 몸뚱이가 발견된 것이다. 20여 일에 걸친 수사 끝에 윤모 씨가 간질병을 앓는 아들이 어린이의 뇌를 먹으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벌인 범죄임이 밝혀졌다.

1932년 1월 일어난 ‘78만 원 도난사건’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액수로, 서민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평양의 한 은행에 침입한 범인들은 철제 비상문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금고를 연 뒤 거액을 집어들었으나 ‘너무 많다’고 생각해 40만 원은 도로 두고 나머지를 훔쳐 달아났다. 1932년 1월 22일 동아일보는 “검거된 범인 2명은 일본인으로, 3일간이나 방에 불조차 때지 못하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형편이었다”고 전했다.

보험제도의 도입과 보급에 따른 보험사기 범죄도 급증했다. 1932년 12월에는 평양 근처에서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오천일 사건이 드러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증인들은 범인 오천일이 거금을 주며 아버지를 살해하라고 사주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피고인은 절대 무죄라고 주장했고 증거 불충분으로 재판 연기와 상소가 이어졌다. 1심 법정은 무기징역을 선고했으나 2심에서는 무죄 판결이 나왔다. 오천일은 최종심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됐지만 당시 일제 법원이 결정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를 희생시켰다는 지적도 있었다.

요즘엔 단순절도 등 생계형 범죄는 줄었지만 보이스피싱 사기나 불법 사금융 같은 금융 범죄는 급증세다. 경찰청은 올해 7월부터 11월까지 입건한 보험사기 사범이 1만1545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06%나 늘어났다고 밝혔다. 고리사채 등 불법 사금융 사범은 64% 늘었다. 지난해 발생한 범죄는 총 218만9452건, 검거건수는 191만4469건으로 87.4%를 검거했지만 2007년보다는 22만3475건의 범죄가 더 발생했다. 가장 많이 발생한 범죄 유형은 절도 사기 횡령 등 재산범죄로 총 50만3302건이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