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서울의 착한 여자’연출 ★★★★ 연기 ★★★☆ 음악 ★★★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하게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고 묻는 브레히트의 질문에 니부어의 답으로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떠올리게 하는 연극 ‘서울의 착한 여자’. 사진 제공 극단 여행자
6·25전쟁이 끝난 직후 서울. 하늘에 대고 못살겠다는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견디다 못해 세 신(神)이 강림한다. 착한 사람을 찾던 그들은 자신들을 하룻밤 재워준 창녀 순이(박선희)에게 앞으로도 착하게 살라며 종잣돈을 주고 승천한다.
그 돈으로 순이는 몸 파는 일을 접고 담배 가게를 차린다. 하지만 순이 주변엔 온갖 인간 거머리가 들끓고 담배 가게는 문 닫을 위기에 처한다. 순이는 고심 끝에 사촌오빠 만수를 후견인 겸 대리인으로 내세운다.
순이는 가난뱅이 철이(이성환)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이 돈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러자 만수가 나서 철이가 뜯어간 순이의 돈을 회수한다. 나아가 만수는 철이를 비롯한 순이 주변의 인간기생충들을 순이 소유 공장의 노동자로 삼은 뒤 악덕기업주로 돈방석에 앉는다. 노동자들은 만수가 순이를 죽이고 재산을 가로챘다고 고발한다. 살인 혐의를 쓰게 된 만수는 자신이 곧 순이이며 철이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배불뚝이 사장 만수로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극단 여행자의 연극 ‘서울의 착한 여자’(각색·연출 양정웅)는 이 순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순이로 사시겠습니까, 만수로 사시겠습니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극 ‘사천의 선인’을 번안한 이 작품은 내용과 형식에서 원작의 묘미를 살려낸다. 음악극 형식을 빌려 물신주의에 물든 사회 비판의 메시지를 압축적 가사로 전달한 점이나 배우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다 자신의 배역이 돌아오면 내려와 연기를 펼친 점이 특히 그렇다. 관객이 극에 몰입해 현실 비판의식까지 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브레히트 연극이론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극단의 대표배우라 할 정해균 씨가 여러 조역을 소화하면서 끊임없이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타적 순이로 살 것이냐, 이기적 만수로 살 것이냐는 질문은 그 핵심이다. 착한 사람이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 보면 악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작가의 비판의식이 들어있다. 1943년 발표된 이 작품이 지금도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딜레마에 대한 해답은 라인홀드 니부어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년)에서 이미 주어졌다. 카를 바르트, 파울 틸리히와 함께 20세기 3대 신학자로 꼽히는 니부어는 이 책에서 개인에 적용할 윤리적 기준과 사회에 적용할 윤리적 기준이 달라야 한다고 갈파했다. 개인이 도덕적이라도 그 개인들의 집합으로서 사회는 이성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집단이기주의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에 대해선 합리적 설득이나 양심에만 호소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비합리적인 강제력이 필요하다. 그 강제력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동일한 윤리적 기준을 갖고 순이는 착한데 그 사회적 존재인 만수는 나쁘다고 바라보는 것 자체가 오류일 수밖에 없다.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순이의 이타성만큼이나 사회적 존재로서 만수의 이기성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만수의 이기성을 통제하면서 순이의 이타성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라도 ‘비폭력적 강제’로서의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브레히트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은 정치 고유의 가치를 부정하고 이를 윤리에 종속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필요하다. 2만5000원. 내년 1월 3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02-3673-1392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