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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미술전람회

입력 | 2009-12-31 03:00:00


《“침쇠하기 거의 극항에 이르럿다 할 우리의 서화계로부터 다시 이러나는 첫금을 거으랴하는 이 새 운동이 과연 엇더한 성적을 보일는지 이 뎐람회의 성공과 실패는 조선서화계에 대하야 증대한 의미가 잇다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21년 4월 1일자》

 1922년 6월 열린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를 단체로 관람하는 여학생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1년 민간서 첫 協展
총독부도 1년 후 鮮展
화가 등용-서양화 보급


1918년 한반도에서는 ‘서화(書畵)협회’가 결성됐다. 1921년 4월 서화협회전(협전)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계동 중앙학교 강당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다. 4월 1일 동아일보에는 ‘서화협회전람회의 초일(初日)’이라는 제목의 현장 스케치 기사가 실렸다. 4월 7일자에는 ‘서화협회전람회 소감’이라는 사설도 실렸다. 이 전람회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준다.

협전이 주목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 새로운 그림 감상 방식을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조선에서 그림이란 개인이 집에 두고 보는 것이었다. 한 공간에 그림을 모아놓고 대중이 구경하는 문화를 협전이 처음 선보인 것이다.

협전의 이력은 서양화의 발전과 함께했다. 초기에는 동양화와 서예 부문의 작품이 많았으나 1925년부터 서양화 비중이 늘고 서예는 줄었다. 이처럼 협전이 선구자 역할을 했지만 서양화 보급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22년 6월 1일 시작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였다.

선전은 총독부가 주관한 전람회로 3·1운동에 놀란 일제가 펼친 문화통치의 일환이었다. 조선인들의 관심을 예술에 묶어놓으려는 술책이라는 비난도 있었으나 총독부의 지원에 힘입어 미술계의 가장 유력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제1회 선전에는 350점가량이 출품됐는데 1941년 제20회 출품작은 1185점이었다.

달리 화가가 되는 길이 없었던 당시 선전은 화가가 되는 등용문이었다. 대구 출신의 이인성은 선전을 통해 떠오른 대표 화가 중 한 명이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진학도 못했지만 18세 때 선전에서 처음 입상한 뒤 1944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품해 선전 최고의 서양화가로 꼽혔다. 선전이 떠오르면서 민간 차원의 협전은 힘을 잃어 1936년 15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선전은 1944년까지 이어졌다.

1930년대에는 녹향회, 향토회, 동미회 등 동인회도 잇따라 결성돼 전시회를 열었다. 도쿄미술학교 동문들인 김용준 홍득순이 만든 동미회는 동문회 성격을 지닌 최초의 단체로 주목받았다. 1930년 4월 17일에는 동아일보 사옥에서 제1회 동미전을 열었다.

김용준이 동미전을 앞두고 4월 12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선 당시 화가들의 고민이 엿보인다. “오인(吾人)은 아즉도 조선의 새로운 예술을 발견치 못하얏다.…오인의 취할 조선의 예술은 서구의 그것을 모방하는데 그침이 아니오 또는 정치적으로 구분하는 민족주의적 입장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오 진실로 그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그 율조를 찾는데 있을 것이다.”

미술 전람회의 전통은 1949년 정부가 창설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로 이어졌다. 신인과 기성 작가들의 작품을 모두 다룬 국전은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였지만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1981년 제30회를 끝으로 국전은 폐지됐고 신인 작가 발굴만 담당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이 1982년에 생겼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