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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최영훈]‘18세의 영원한 청년’

입력 | 2010-01-12 20:00:00


1963년 4월 25일 첫새벽에 태어났다. 1980년 11월 30일 밤 12시 생을 마감했다. 17년 220일간, 짧게 살다 갔다. 하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굵고 깊다. 요절한 천재의 얘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방송해드린 DBS 동아방송을 들으셨습니다. 1963년 주파수 1230kHz, 출력 10kW로 첫 전파를 발사한 이래 18년 동안 청취자 여러분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저희 동아방송이 이제 고별의 장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비통한 고별 방송을 끝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방송 얘기다.

군부탄압에 전파 중단한 동아방송

태어날 때부터 동아방송은 민주정부와는 좋은 인연을 맺었다.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다. 이즈음 동아일보는 새 시대의 흐름에 맞춰 방송 진출을 구상했다. 언론의 활성화와 다양화를 기대하는 여론에 따라 정부 역시 민간방송 육성 방침을 세웠다. 서울지역엔 인구비례에 따라 방송을 한 곳만 허가할 계획이었다. 본보와 부산의 문화방송 등 5곳에서 허가를 신청했다. 1961년 1월 16일 주무부처인 체신부는 본보의 방송 설립을 가인가했다. 4·19혁명으로 태어난 민주당 정부가 자유당 독재의 붕괴에 큰 역할을 한 동아일보에 신뢰와 지지를 보낸 것이다.

반면 쿠데타 집권세력과는 악연의 연속이었다. 5·16군사정변으로 동아방송 설립 작업은 중단됐다. 군정 2년 6개월은 언론의 시련기였다. 언론사를 강제 매각하고 언론 구조를 개편하는 포고령이 발동됐다. 당시 여론을 주도했던 동아일보는 특히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천신만고 끝에 1963년 4월 25일 오전 5시 30분 수도권에 울려 퍼진 개국의 첫 소리는 뉴스였다. 첫 방송을 뉴스 보도로 시작한 것은 당시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뉴스에 이어 리스트의 교향시 전주곡이 울려 퍼지면서 첫인사가 25분간 계속됐다. “4월 25일 여명이 멀리 동터 오는 지금 동아방송의 탄생을 알리는 고고(呱呱)의 전파가 여러분의 가정을 찾아 개국의 첫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우리 방송 사상 처음 시도된 고발 방송칼럼 ‘앵무새’는 인기 프로였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1964년 6월 계엄당국은 이 칼럼의 내용을 문제 삼아 최창봉 방송부장과 이종구 외신부장 등 6명을 구속했다. 군사재판을 거쳐 5년 1개월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날개 꺾인 ‘앵무새’는 끝내 부활하지 못했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한술 더 떴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의 일환으로 언론통폐합에 착수했다. 5·16 때보다 훨씬 조직적이었고 규모도 컸다. 앞서 박권상 논설주간 등 33명이 강제 해직됐다. 검찰의 12·12, 5·18내란음모사건 수사 결과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의 조사 결과, 진실화해위의 최근 조사 결과는 당시의 언론탄압 만행을 낱낱이 확인했다.

동면 깨어나 비상의 날개 펴길

언론은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를 감쪽같이 몰랐다. 짧았던 그해 ‘서울의 봄’, 김상만 회장과 이동욱 사장은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해 동아방송 지방국 신설과 TV국 설치허가를 요청했다. 방송국 시설 확충을 위해 여의도별관 증축 공사에도 착수했다. 공사가 끝나면 DBS의 키스테이션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김 회장은 그해 신군부가 집권한 뒤 10월 27일 발족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언론계 대표로 참여하라는 요청을 끝까지 뿌리쳤다. 거듭되는 압박에 시골로 몸을 피하기도 했다. 개국 20년을 앞두고 추진하던 전국방송과 TV 개국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 철권(鐵拳)을 휘두르던 신군부는 방송의 명줄마저 끊었다.

본보는 다시 방송에 몸을 던질 채비를 하고 있다. 30년째 동면(冬眠)하던 ‘18세의 청년’이 깨어나 비상의 날개를 활짝 펼치길 기대한다.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