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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취업

입력 | 2010-01-13 03:00:00


《“저지할 바를 모르는 심각한 불경기의 파도는 나날이 실업자를 더하고 있을 뿐이다. 15일 경성부 사회과 조사발표에 의하면 지난 6월 말 현재 부내의 실업자 수효는 조선인 5960인, 일본인 1090인으로 모다 7050인에 달한다. … 그들의 소속된 가족을 평균 5명으로 본다면 굶주리는 가족이 무려 3만5000여 명에 달한다고 본다.”
―동아일보 1932년 7월 15일자》

日강점기 구직난 심각
무전취식에 사기까지 ‘룸펜’ 일제 단속 벌여


 1930년대 서울 서대문경찰서의 ‘룸펜 일제 단속’에 걸려 경찰서에 온 사람들. 오전 2시부터 2시간 동안 시행한 검문에 453명이 잡혔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 기관이 들어섰다. 우수한 인력은 쏟아져 나왔지만 그들을 수용할 좋은 직장은 극히 부족했다. 고학력 인텔리들은 타의에 의해 무직자로 변해 ‘룸펜’으로 불렸다.

“‘룸펜’이란 신어가 유행되면서부터 거의 모든 조선 청년들이 새삼스럽게 룸펜이 되어버린 감이 있다 … 이 룸펜군은 비록 눈칫밥을 먹고 찬 방에서 배를 깔고 원고료 없는 원고를 쓰고 있을망정 불원한 장래에는 현실성이 충분히 있다고 확신하는 막연한 희망과 거기 따르는 지조만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 똥구루마를 끌지 않고 ‘아끼이모(군고구마)’ 장수를 하지 않는 그들의 배고픈 품위와 체면을 간신히 변명해준다.”(박로아의 ‘룸펜시대’, ‘혜성’ 1932년 2월호)

무직의 설움은 조선인에게 더 많았다. 동아일보는 1929년 4월 10일 “업을 구하야 호구지책으로 방황하는 자가 평양에도 나날이 증가하는데 평양부 직업소개소에서만 지난 3월 동안 직업 소개한 것을 보면 일본인은 3명이요 조선인은 45명이었다”라고 전한다.

취업난은 사범대 졸업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입학하야 졸업만 하면 취직은 보장되는 사범학교에도 수년 내에 취직의 난관이 있어 … 금년의 졸업생은 지금까지 반수만 취업됐다.”(동아일보 1932년 2월 24일)

극심한 실업난으로 인한 범죄 기사도 당시 풍경을 전한다. 한 무직자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음식점에서 무전취식해 경찰에 붙잡힌 뒤 “도적질은 차마 하지 못해 무전취식을 했다. 차라리 류치장이나 형무소에 가는 편이 낫겠다”고 밝혔고, “취직을 시켜주겠다”며 취업 희망자 3명으로부터 양복, 구두, 시계를 빌린 뒤 전당포에 담보로 잡혀 현금화한 사기꾼도 검거됐다.

룸펜들로 인한 범죄가 늘자 경찰은 대대적인 단속을 하기도 했다. “인천경찰서에서는 3일 오전 1시를 기하야 거리의 ‘룸펜’인 부평초(浮萍草)를 일제 검속하여 일단 취조를 하고 있다. 검속된 인원은 260명이었다”(동아일보 1939년 9월 6일). 경찰은 룸펜들을 잡아 천연두 환자를 가려내거나 예방 접종을 하기도 했다.

통계청은 최근 지난해 11월 기준 고용동향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실업자, 취업 준비자, 그냥 쉬는 사람 등 ‘사실상 실업자’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 329만9000명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11월 25∼39세 ‘청년층 취업자’는 월평균 843만6000명으로, 지난해 평균에 비해 24만8000명(2.9%)이 줄었다. 세기는 바뀌었어도 일자리 부족은 여전하고 청년 실업자들의 한숨은 깊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