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할 바를 모르는 심각한 불경기의 파도는 나날이 실업자를 더하고 있을 뿐이다. 15일 경성부 사회과 조사발표에 의하면 지난 6월 말 현재 부내의 실업자 수효는 조선인 5960인, 일본인 1090인으로 모다 7050인에 달한다. … 그들의 소속된 가족을 평균 5명으로 본다면 굶주리는 가족이 무려 3만5000여 명에 달한다고 본다.”
―동아일보 1932년 7월 15일자》
日강점기 구직난 심각
무전취식에 사기까지 ‘룸펜’ 일제 단속 벌여
1930년대 서울 서대문경찰서의 ‘룸펜 일제 단속’에 걸려 경찰서에 온 사람들. 오전 2시부터 2시간 동안 시행한 검문에 453명이 잡혔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무직의 설움은 조선인에게 더 많았다. 동아일보는 1929년 4월 10일 “업을 구하야 호구지책으로 방황하는 자가 평양에도 나날이 증가하는데 평양부 직업소개소에서만 지난 3월 동안 직업 소개한 것을 보면 일본인은 3명이요 조선인은 45명이었다”라고 전한다.
취업난은 사범대 졸업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입학하야 졸업만 하면 취직은 보장되는 사범학교에도 수년 내에 취직의 난관이 있어 … 금년의 졸업생은 지금까지 반수만 취업됐다.”(동아일보 1932년 2월 24일)
극심한 실업난으로 인한 범죄 기사도 당시 풍경을 전한다. 한 무직자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음식점에서 무전취식해 경찰에 붙잡힌 뒤 “도적질은 차마 하지 못해 무전취식을 했다. 차라리 류치장이나 형무소에 가는 편이 낫겠다”고 밝혔고, “취직을 시켜주겠다”며 취업 희망자 3명으로부터 양복, 구두, 시계를 빌린 뒤 전당포에 담보로 잡혀 현금화한 사기꾼도 검거됐다.
룸펜들로 인한 범죄가 늘자 경찰은 대대적인 단속을 하기도 했다. “인천경찰서에서는 3일 오전 1시를 기하야 거리의 ‘룸펜’인 부평초(浮萍草)를 일제 검속하여 일단 취조를 하고 있다. 검속된 인원은 260명이었다”(동아일보 1939년 9월 6일). 경찰은 룸펜들을 잡아 천연두 환자를 가려내거나 예방 접종을 하기도 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