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을 위한 영화 '나인'의 실패이유
지난해 12월 31일 개봉한 뮤지컬영화 '나인'의 관객들 반응이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극장 문을 나서는 이들의 표정을 보니 상당수가 싸늘했다.
나인은 영화감독에 의한, 영화감독을 위한, 영화감독의 영화이다.
영화 감독을 위한 영화 나인.
뮤지컬을 영화로 만드는 대가인 롭 마샬이 동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영화감독이 한 덩어리로 뒤엉켜있다. 첫째는 이 영화의 감독 롭 마샬, 둘째는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감독 귀도 콘티니(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 끝으로 이 영화의 원작인 '8과 1/2'(1963년)을 만든 이탈리아의 거장 페델리코 펠리니 감독이다.
펠리니 감독은 이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이 1965년 이탈리아이고, 주인공 귀도의 모델이 펠리니 감독이니 그의 아우라를 빼고는 이 작품을 논하기 어렵다.
▶ 세 명의 영화감독이 등장하는 영화
폭설이 내린 1월 어느 날, 이장호(65) 감독과 점심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는데 이 노장 감독의 다음 행선지가 영화 '나인'이라고 했다. 실제 영화감독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궁금해 다음날 이 감독에게 티타임을 요청했다. '나인'에 대한 대담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며 이어졌다. 대화하는 내내 노 감독의 주옥같은 경험담이 솟아나왔다.
"나야 영화감독이니까 아무래도 일반관객 보다는 남다른 느낌이 있었지. 펠리니 감독의 원작을 흥미롭게 봤던 기억도 있고. 그런데 아무래도 '나인'은 다소 겉핥기에 그친 느낌이야. 기대에 좀 못 미쳤다고 할까."
- 특히 어떤 점에서 실망하셨나요.
"감독이 작품 하나를 완성해 나가는 동안, 아니 영화 하나를 기획하고 추진하고 개봉 후 시장판단을 기다리기까지 오랜 기간 고뇌에 빠지고, 머리 아프고, 괴로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런데 '나인'은 너무 귀도의 여성편력에만 포커스를 들이댄 것 같아. 한 인간의 입체적인 고민을 너무 흥미위주로 단순화 했다고 할까. 뮤지컬의 특성 상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인은 전형적인 대작 영화의 약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 감독님께서 발견했던 흥미로운 대목을 꼽아주신다면.
"우선 이 영화에선 '귀소본능'이 중요하지. 귀도는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을 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나인'에서뿐 아니라 펠리니의 작품에서도 전후 가난한 이탈리아 상황에서 유년기 악동의 추억이 자주 나타나거든. 나이가 들어가면서 오히려 어릴 때 기억이 더 선명해지는 경우가 많지. 작가에게 귀소본능은 나이가 들어 솔직한 현실을 밝혀주는 영감이 되는 것 같아. 이를테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노년기에 만든 걸작 '꿈'에서도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주요 모티브가 되거든."
▶"감독이 대작 영화를 찍기 시작하면 그것이 내리막"
- TV 광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눈에 대작 영화라는 점이 화젯거리였습니다. 성공을 꿈꾸는 감독의 절박함이라고 볼 수 있겠죠.
"맞아. 귀도는 아홉 번째 영화에서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데 중견감독들이 이런 한계상황에서 돌파구를 모색하는 것이 '대작주의'라는 함정에 빠지는 과정이야. 극중 귀도도 각본을 못 쓰는 상태에서 '이탈리아'라는 무조건 엄청난 대작을 만들 것이라고 홍보하게 되는데 이건 우리나라 감독들에게서도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나도 주변에서 아무개 감독이 어떤 대작을 찍는다더라 하면 '아, 저 친구 이제 내리막길에 섰구나'하며 그런 소식이 그의 몸부림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니까. 내가 스승으로 모셨던 신상옥 감독의 경우에도 말년에 노스트라다무스라든가 하는 커다란 모티브에 빠지시더라고. 물론 일정 수준 이상에 올라선 감독들은 공력이 있어서 그런 대작을 성공시키는 경우도 있지. 문제는 역량도 안 되는데 대작의 판타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몰락하는 감독들인데 이런 경우를 보면 안타깝지."
- 여배우에 대한 감독의 집착도 엿보이던데요.
"'나인' 속에서 귀도가 몰입하는 대상 중 클라우디아라는 톱스타가 있는데 이 둘의 관계는 극중 다른 여성들과 달리 서로 아련한 감정은 있었으나 우정 비슷한 관계로 미화되었지. 나도 한창 때 이와 비슷한 설정을 작품 속에 넣어보려 했던 때가 있었어. 그런데 대부분의 감독들에게서 주연여배우와의 관계를 '우정'이나 '동지애'로 포장하려는 경향이 많이 나타나거든. 내가 지금 연륜이 되니까 감독들의 그런 성향이 너무 유치해 보이는 거야.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영화 속 귀도와 클라우디아에 대한 설정도 어설프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내 눈에 너무 뻔히 보이니까. 하하."
이 대목에서 "그럼 감독과 여배우의 실제적인 관계는 어떤 것인가요?" 하고 물었다. 이 감독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잠시 생각하더니 슬쩍 넘어갔다. 필자는 '그건 시간이 더 흘러야 솔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떤 대목에서 감독의 의도에 공감할 수 있었나요.
"이 영화에서 마음에 쏙 들었던 장면이 있는데 여배우 캐스팅을 위한 카메라 테스트씬이에요. 감독의 부인이 된 루이자도 여배우였는데 귀도가 루이자를 테스트하다가 머리카락을 풀어보고 '고맙다. 내 눈을 사로잡아줘서'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지. 그런데 영화 끝부분에 다른 신인여배우를 테스트하며 똑같은 행동을 하는 장면이 나오데. 루이자와 신인여배우 역 배우들의 마스크는 내가 좋아하는 인상의 얼굴들인데 그 두 장면의 대비가 섬세해서 재미있었어. 감독의 일상에서 그럴법한 습관적 행동을 잘 포착했다고 할까."
- 감독님께서 귀도처럼 영감이 고갈된 어려움에 빠지셨을 때 뮤즈를 만났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음, 너무 깊이 들어가는걸. 다른 방식으로 대답해보지. 하나는 '바보선언'을 만들 땐데 사회의 억압적 상황에 너무나 분노를 느껴 저항감이 폭발할 것 같았지. 그때 막 가자는 식으로 영화를 망치려는 심경으로 찍었어.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아, 이것이 내 스타일이구나' 깨달아지면서 표현하기 어려운 성취감이 느껴지는 거야. 그리고 또 한 번은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감독이 되고 처음 큰돈을 벌고 나서였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작품을 찍었는데 제작비 걱정 안하고 감독으로서 하고 싶은 대로 정말 마음대로 찍었지. 흥행여부와 관계없이 또 다른 경지를 경험한 느낌이랄까."
노장 이장호 감독의 최종 목표는 뮤지컬영화를 찍는 것이다. 어릴 적 ‘7인의 신부’라는 할리우드 뮤지컬을 보고 꾸어온 꿈이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 이 감독, "내 판타지도 뮤지컬영화를 찍는 것"
영화 '나인'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현재 한국영화계에 대한 조언들이 있었다. 이장호 감독은 담담하게 B급 영화가 주류가 된 트랜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최근 A급이라고 언급할만한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오아시스'에서 창에 비친 나무그림자를 설경구가 잘라내는 장면을 한국영화 최고의 장면으로 꼽았다.
그 또한 영화 속 귀도처럼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의 추억을 자주 떠올린다고도 했다. 멋지고 특별한 구조의 집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유년기 탁월한 공간감각 때문에 홍익대 건축미술과에 입학했는지 모른다.
1960대 중반의 노 감독은 여전히 순수하고 소년 같았다.
1974년의 초기작 '별들의 고향'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요즘도 "감독님의 팬입니다"하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영자의 전성시대'를 감명 깊게 봤습니다"하면 너무 허탈하다고 말한다(이 영화는 1975년 김호선 감독 작품이다). 그는 '어둠의 자식들', '바람 불어 좋은 날'처럼 소외를 다룬 문제작 외에도 '무릎과 무릎 사이', '어우동' 같은 현대물과 사극의 에로티시즘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 등 흥행대작, '명자, 아끼꼬, 쏘냐'와 같은 현대사 속 인생사 이야기, '낮은 데로 임 하소서'라는 신앙 영화에 이르기까지 1970~1990년대를 종횡무진 행군한 한국영화의 산 증인이다.
인터뷰 말미에 "앞으로도 계속 찍으실 거죠?"라고 물었다. 그는 "당연하지"라고 호쾌하게 답했다. 뜻밖에도 이 감독은 자신의 판타지는 뮤지컬영화를 찍는 것이라고 했다. 어릴 적 '7인의 신부'라는 할리우드 뮤지컬을 보고 꾸어온 꿈이란다.
그의 사무실에는 작지 않은 규모의 스튜디오가 딸려있었는데 그는 색소폰을 불고, 각국의 타악기를 연주할 뿐 아니라 오카리나를 가르치고 있다.
이장호 감독이 밝힌 올해 계획은 국내에서 8년간 공연된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남녀관계회복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 만드는 것과 가족치유 관련 시나리오를 뮤지컬화하는 것이다.
최영일/ 문화평론가 incent201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