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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 로고스와 뮈토스의 변증법적 결합으로서 ‘아바타’

입력 | 2010-01-14 17:23:04


요즘 가장 ‘핫’한 영화 ‘아바타‘. ‘아바타’는 로고스=기병대=해병대=자원개발론으로 이어지는 한 축과 뮈토스=인디언=나비=환경보호론으로 이어지는 다른 한축의 대결로 압축된다.



서양과 동양은 다른 듯하면서 쌍둥이처럼 닮은 게 참 많습니다. 학문 영역을 놓고 봤을 때 동아시아에서 한자를 모르면 안 되듯 서양에선 라틴어를 모르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한자문화권과 라틴어문화권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새로운 통찰도 생깁니다. 라틴어문화권에 대해 좀더 심화학습을 하려면 그 원형이 되는 그리스어를 알아야합니다. 그럼 한자문화권에선? 한자의 구성원리를 설명한 한대의 '설문해자'가 있습니다. 오늘날 한자의 원형을 형성하기 전 갑골문을 포함한 고대한자가 그에 해당합니다.

고대 한자 해석의 전문가 시라카와 시즈카에 따르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설문해자' 류의 한자풀이는 후대의 왜곡과 첨삭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름 명(名)은 흔히 저녁 석(夕)과 입 구(口)의 합성어로 '저녁에는 입으로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풀이했습니다. 그러나 시라카와의 연구에 따르면 名의 夕은 제사에 쓰이는 고기를, 口는 조상의 사당에 고하는 축문을 담는 제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조상에게 제례를 치르고 부여하기에 함부로 불려선 안 되는 '영혼의 이름'을 뜻한 것입니다. 함부로 불러선 안 된다는 의미로 지어진 한자가 큰 소리로 불러야할 이름으로 오독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도 이와 비슷한 역전현상이 여럿 발견됩니다. 신화의 언어인 뮈토스와 이성의 언어인 로고스의 위상 차이도 그중 하나입니다. 신화학자인 브루스 링컨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전까지 로고스는 믿을 수 없는 간교한 언어를 뜻한 반면 뮈토스는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언어였습니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대를 거치면서 철학자의 언어인 로고스가 신뢰할 수 있는 언어이고 시인의 언어인 뮈토스는 거짓에 물든 언어로 뒤바뀝니다. 이와 함께 뮈토스로 이뤄진 신화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로고스로 이뤄진 철학과 과학이 진실한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천공에 떠 있는 ‘할레루야 산’은 지구인의 침공에 맞설 나비족 최후의 성채(뮈토스)로 등장한다.



이런 역전현상은 역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로고스가 각광받지만 민족주의와 낭만주의 시대가 되면서 다시 뮈토스의 위상이 올라갔습니다. 흔히 20세기를 과학의 시대라고 하지만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스를 중심으로 과학의 한계를 극복할 신화적 세계관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된 세기이기도 합니다. 20세기말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그리스신화의 붐도 로고스와 뮈토스의 이런 엎치락뒤치락 담론게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건국사의 죄의식을 씻어낼 역사대체물로서 '아바타'

21세기 새로운 영상문화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영화 '아바타'에서도 이런 로고스와 뮈토스의 대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2세기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채 판도라 행성개발에 나선 인류야말로 로고스의 합리성을 대변하는 과학적 존재입니다. 그들은 자원이 고갈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언옵티넘'이라는 자원의 효율적 개발에 몰두합니다. 반면 이에 맞서 자신들의 삶터를 지키려는 판도라의 원주민 나비족은 뮈토스의 계시에 충실한 신화적 존재입니다. 판도라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로 연결돼있다고 믿는 나비족의 사유방식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의 그것을 닮아있습니다.

미국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아바타'는 일종의 대체역사물입니다. 미국 개척의 역사는 곧 뮈토스의 세계관을 지녔던 인디언의 공간을 로고스의 세계관을 지녔던 백인이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모든 국가의 건국신화에는 그 건국과정에서 작동한 초석적 폭력에 대한 죄의식이 감춰져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근대국가로서 미국 건국사의 무의식에 작동하고 있는 죄의식은 바로 신세계가 백인 기독교도를 위해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라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e)이란 로고스의 그늘 아래서 인디언을 학살한 것입니다. '아바타'는 이런 죄의식을 해원하는 형태로 미래의 로고스로 무장한 또 다른 형태의 기병대에 맞선 22세기 인디언의 승전가를 노래합니다.

‘아바타’는 케빈 코스트너가 인디언의 삶에 동화된 백인 기병대원으로 등장하는 ‘늑대와 함께 춤을’의 명백한 대체역사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케빈 코스트너가 인디언의 삶에 동화된 백인 기병대원으로 등장하는 '늑대와 함께 춤을'의 명백한 대체역사물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동시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라퓨타'를 뒤집어 모방합니다. '라퓨타'에서 천공의 섬 라퓨타가 비인간적인 과학문명의 성채(로고스)를 상징한다면 '아바타'에서 천공에 떠있는 '할레루야 산'이야말로 지구인의 침공에 맞설 나비족 최후의 성채(뮈토스)로 등장합니다. 이와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친환경적 주제의식이 영화 깊숙이 스며듭니다. 이리하여 '아바타'는 로고스=기병대=해병대=자원개발론으로 이어지는 한 축과 뮈토스=인디언=나비=환경보호론으로 이어지는 다른 한축의 대결로 압축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이분법적 구도로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이 영화의 세계적 흥행의 후폭풍으로 벌써부터 다종다기한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 때문에 이 작품의 내용을 로고스에 대한 뮈토스의 승리라는 단순구조로 읽기 보다는 로고스와 뮈토스의 변증법적 결합이란 복합구조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로고스와 뮈토스의 변증법적 결합으로서 '아바타'

이를 위해선 먼저 로고스와 뮈토스의 영역을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고스가 분석과 이성. 과학의 언어라면 뮈토스는 직관과 계시, 신화의 언어입니다. 이 둘 중 어떤 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물론 인간의 언어가 종교에 바탕을 둔 신성하고 통합적인 언어로서 뮈토스에서 출발해 세속적이고 분별적인 로고스로 분화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뮈토스가 '최초의 언어'이기에 더 탁월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뮈토스의 지배를 받는 사유 중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 많았는가는 종교적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명백합니다. 인간세상과 천문지리현상이 서로 연관돼 있다는 동양의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이 비록 당대에는 상당한 윤리적 호소력을 지녔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로밖에 치부될 수 없습니다. 모든 뮈토스가 통찰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고스의 필터를 거쳐 살아남은 뮈토스만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21세기 새로운 영상문화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아바타'에서는 이성의 언어인 로고스와 신화의 언어인 뮈토스의 대결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제이크가 로고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나비족의 뮈토스를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아바타의 탈을 쓴 제이크야말로 나비족을 관찰하고 설득하기 위해 파견된 거짓과 기만의 존재였음을 떠올려보십시오. 그야말로 기원전 5세기 이전 고대 그리스인이 이해했던 로고스의 본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들 나비 족의 뮈토스적 세계를 구원한 '토루크 막토' 역시 제이크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아바타'의 히로인 네이티리가 자신의 운명으로 선택한 이가 같은 나비족으로 네 손가락을 지닌 츠테이가 아니라 인간과 나비족의 돌연변이로서 다섯 손가락을 지닌 아바타라는 점 또한.

이는 20세기 과학문명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많은 환경론자들은 20세기 과학이 지구환경을 파괴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만물이 하나로 연결돼있다는 신화적 뮈토스가 최소한 양자차원에선 성립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도 역시 그 20세기 과학이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물질이 입자일 수도 있고 파동일수도 있다는 뮈토스의 형용모순을 풀어낸 것 또한 양자역학이라는 이름의 로고스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뮈토스가 만물의 입자라면 로고스는 그를 향해 쏴지는 빛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로고스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했을 때 비로소 빛을 내는 것이 진짜 뮈토스인 것입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