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시기를 다룬 ‘추노’는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KBS 드라마 \'추노\'의 한 장면.
드라마 '추노(推奴)'와 오버랩 되는 탈북자 소설 '찔레꽃'
2년 전 여름 중국 지린성 옌지에 간 적이 있다.
우리에겐 연변으로 알려진 그곳은 뜻밖에 고층빌딩이 즐비했고 자유로워 보이는 시민들로 가득 찬 현대 도시였다. 그러나 도심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도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조선족 마을에 머물며 그곳 주민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자유인처럼 보였던 그들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탈북자'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무허가로 민박 중이던 기자에게 웬만하면 마을을 싸돌아다니지 말라고 당부했다.
"당신은 누가 봐도 한국사람 티가 난다. 여기 조선족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탈북자들을 접할 기회가 있는데, 당신까지 엉키면 중국인들이 '혹시나' 하고 당신을 공안에 신고할지 모른다. 실제 이방인이 찾아오면 신고하는 것도 맞고…."
● 조-중 국경에는 언제나 탈북자들의 아픔이
KBS 수목드라마 '추노'가 방영 4회 만에 30%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또 하나의 대박 드라마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소설 '남한산성' 이후 부쩍 높아진 병자호란(1636~1637)에 대한 관심과 속도감 넘치는 스토리, 한층 고급화된 화질이 만들어 내는 절묘한 조화 때문이다.
그런데 '추노'는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에 벌어진 정치적 갈등보다 병자호란 이후 부쩍 증가한 노비계급의 현실을 실감나게 그려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던진다. '추노'라는 낯선 단어는 독립적 생계를 꾸리는 외거노비를 부르는 말이기도 했고, 또한 돈을 받고 도망친 노예를 수색해 연행해 오는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기자는 드라마 '추노' 속 조선 중기 노비들의 비참한 현실과 탈출한 노비를 관아에 팔아넘기는 야성미 넘치는 추노패거리를 보고 엉뚱하게 탈북자들과 이를 뒤쫓는 한국인(혹은 중국공안)이 떠올랐다.
1회에서 추노패거리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망가려는 노비 가족을 잡아들인다. 지옥탈출을 눈앞에 둔 이 가족일행은 강을 건너기 위해 1인당 열 닷냥을 내라는 브로커의 제안에 절망한다. 그는 "사람 목숨이 중요하지 돈이 중요하냐?"고 절규하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한다. 예나지금이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인도적 선행을 실천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한양으로 압송된 이들은 극한의 고문에 처해진다. 조선시대 도망간 노비에 가해진 형벌을 그대로 재현한 TV드라마는 순간 '역사스페셜'을 거쳐 '다큐멘터리'로 승화된다. 배우 공형진이 연기한 노비 가장의 얼굴엔 '노(奴)'자라는 끔찍한 문신이 새겨지고, 마누라는 거꾸로 매달리고 어린 딸은 양반댁 어르신의 잠자리 노리개로 전락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10년에 걸친 남녀 주인공(장혁과 이다해)의 애절한 사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드라마적인 설정이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옛사랑을 찾기 위해 추노패거리가 되고, 사랑과 돈을 동시에 쫓는 과정에 우연치 않게 청나라와 조선의 운명을 가르는 역사의 흐름에 휩쓸린다는 게 주된 관전 포인트이다.
● 추노의 노비와 오버랩 되는 찔레꽃의 '충심'
2008년 출간된 소설가 정도상의 ‘찔레꽃’은 현대판 유민(流民)인 탈북자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2008년 여름에 나온 정도상의 소설집 '찔레꽃'은 충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북한 젊은 여성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수작이다. 그녀는 인신 매매꾼에 속아 중국인과 강제결혼을 해야 했고 이후 간신히 탈출해 중국 흑룡강성 빈촌을 떠돌다 다시 남한에서 노래방 접대부로 일해야 했다. 소설은 중국 전역을 오가며 탈북 소녀들의 방랑 과정을 마치 '추노'의 카메라처럼 추적한다.
현대판 노비를 탄생시킨 북한과 이를 방관하는 중국에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댈 필요는 없다. 소설은 그 과정에 한국으로의 밀입국 비용을 뜯어가는 일부 탈북단체의 실상과, 탈북녀를 노래방 도우미로 전락 시키는 한국 사회의 야만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망국의 한을 담은 병자호란이 배경으로 나오는 사극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1980년대에만 해도 병자호란이란 북방의 야만족이 일으킨 일개 전쟁 정도로 소개됐으니 말이다.
이제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세 번 숙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럼에도 망가진 나라를 일으키지 못하고 주자학의 명분론에 빠져 당파싸움이나 일삼은 조선의 고관대신들의 실책을 비판할 수 있게 됐다.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은 솔직히 인정하고 그 과오를 반성의 계기로 삼아도 좋다는 국가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족의 절반은 아직도 그런 여유를 느낄 겨를이 없다. 오히려 17세기의 오류를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이 노비를 생산해 내는 비극적 체제를 말이다.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은 실감나는 추격장면 뒤로 펼쳐지는 수려한 배경이다. 사진 출처=KBS
# 결정적 장면
최근 신작 드라마는 초반에 시청자들의 시선을 얼마나 사로잡는가에 따라 전체 운명이 결정된다. 때문에 제작진은 1회에 자극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등장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 점에서 '추노'는 대단히 성공적인 작품이다. 도망자와 추적자와의 관계를 단 1회 만에 효과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노비를 찾아 추노패가 된 몰락한 양반 '대길(장혁 분)'의 사정을 이해한 만큼 더 이상 추노패는 악역이 아니라 멋진 근육을 지닌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이제 소현세자 편에 섰다가 몰락해 노비가 된 송태하(오지호)와 대길이 어떤 식으로 화해할 지가 관심거리다.
그러나 달콤 살벌한 추격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도망 신에서 펼쳐지는, 주옥같이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자연이다.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헤맸을 제작진의 고충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완벽한 배경음악에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까지 '추노'는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