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물자 전달 한국 봉사단
이재민들 몰려와 한때 위기
아이티 지진 참사로 거리로 내몰린 이재민의 고통이 일주일째로 접어들면서 재난지역의 치안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생필품을 얻기 위해 곳곳에서 약탈에 나서면서 수도 포르토프랭스는 폭동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아이티 정부는 이달 말 기한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치안 확보를 위해 18일에는 7500명의 미군이 추가 투입돼 총 1만3000명 이상의 병력이 배치될 예정이다. 아이티 경찰도 거리 통행을 제한하고 약탈 방지를 위해 발포까지 하는 등 질서 유지를 위한 조치를 강화했다.
지진 발생 6일째인 17일 경찰이 수도 도심에서 대형 상점을 약탈 중인 수백 명의 주민에게 총을 쏴 30대 남성이 사망했다. 일부 이재민 역시 약탈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고 있다. 대통령궁 인근 라빌 지역에서는 이재민들이 경찰 언론인은 물론이고 일반 주민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 경찰이 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치안이 불안해지자 일부 이재민은 수도를 떠나 교외로 피난 행렬에 나서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이재민 구호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기독교연합 봉사단은 이날 오전 의약품과 구호품을 직접 나눠주려다 이재민이 대거 몰리면서 통제 불능의 상황이 되자 결국 포기했다. 링거 1만3000병 등 의약품 3만 달러어치와 물 비스킷 생리대 등 구호품 2만 달러어치를 도미니카공화국에서 구입해 15일 포르토프랭스에 들어온 봉사단은 유엔군 1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2대의 대형 트럭에 구호품을 싣고 이재민 천막촌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유엔군이 잠깐 보이지 않는 사이 이재민이 몰려들어 트럭 뒷문을 열라고 소리치는 등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줄을 세워 차근차근 나눠줄 수 있는 상황이 안 돼 봉사단은 결국 이날 오후 병원 보육원 선교원 등 기관에 구호품을 전달했다.
봉사단 관계자는 “시내의 재래시장엔 큰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대 후반의 여자는 봉사단이 탄 버스를 향해 손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며 “심지어 구호단체 회원 중 일부는 포르토프랭스의 대표적인 빈민촌인 시테솔레유의 한 병원에 의약품을 전달하고 나오는 길에 권총을 든 이재민에게 돈을 빼앗기기도 했다”고 전했다.
30도가 넘는 한낮의 더위에 미처 매장하지 못한 시신들이 부패하면서 생길 전염병에 대한 대책도 시급한 실정이다. 아이티의 보건위생 체계가 사실상 무너진 상태에서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사망자의 시신 중 상당수가 그냥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이티 지진 구호단원은 전염병 예방 접종을 권고 받고 있다. 매장된 시신만 7만 구로 확인된 가운데 아이티 현지에서 미군의 구호작업을 지휘하는 켄 킨 중장은 “사망자가 20만 명에 이를 수도 있다”고 밝혔다.
포르토프랭스(아이티)=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권인혁 前駐아이티 대사 “아이티, 6·25때 한국에 물자지원… 이제 우리가 갚아야”▼ “지금은 최빈국이지만 60년 전 6·25전쟁 때 한국에 1000달러 이상을 지원한 나라입니다. 당시 인구가 300만∼400만 명에 불과한 소국 아이티로서는 나름대로 큰 규모로 한국을 도와준 셈이에요. 도움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아이티 지원에 나서야 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티 주재 한국대사(1987∼1990년)를 지낸 권인혁 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63·사진)은 18일 한국 정부가 강진 피해를 본 아이티에 대한 추가 지원에 나선다는 얘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아이티는 6·25전쟁 때 한국에 물자를 지원한 32개국 중 하나다. 권 전 이사장은 “현재의 아이티는 뒤발리에 부자의 오랜 독재(1957∼1986년)로 행정부가 재난 대처는커녕 자치 능력도 상실한 상태”라며 “대통령의 평균 수명(재임기간)이 8개월에 불과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가 대사로 근무했던 3년 반 동안에도 쿠데타로 대통령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아이티 정부는 재난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권 전 이사장은 진단했다. 그러면서 “아이티 재건을 위해 유엔의 신탁통치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인구의 5%에 불과한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가 부를 독점하면서 95%의 흑인이 느끼는 사회적 불신도 문제다. 권 전 이사장은 “강진 피해 이후 속수무책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진 것도 정치, 사회적 불신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이티는 국가 존립에 필요한 기초 인프라가 부족하고 경제난도 심각하다고 그는 전했다.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에 사는 이민자의 송금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 전 이사장은 또 “아이티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 아니어서 내진 시설이 없고 목조건물이 많아 피해가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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