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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영화

입력 | 2010-01-19 03:00:00

‘아리랑’ 인기 오르자 영화제작 통제하려 비싼 검열료 징수




《“조선 ‘키네마’ 영화회사에서는 뎨 일회 작품으로 ‘룡중조’라는 영화를 제작하야 만흔 환영을 밧고 뎨 이회 작품으로 조선 영화 배우계 일류스타인 라운규 군을 중심으로 현대극 ‘아리랑’을 촬영중이라는 바 녀배우로는 신흥련이란 신진 녀우가 출연하엿스며 또는 이 영화에 특별한 것은 엑스트라를 수백 명이나 쓰는 것이라 한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19일자》

 1926년 개봉돼 조선 영화 제작 열풍을 일으킨 ‘아리랑’. 안타깝게도 원본 필름은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아리랑’의 주인공 영진은 미치광이다. 마을에서 놀림감이던 그는 악덕 지주이자 일본의 앞잡이인 오기호가 누이동생 영희를 겁탈하려는 것을 보고 낫으로 오기호를 찔러 죽인다. 영진은 붉은 피를 본 충격으로 제정신이 들지만 법망을 피하지 못하고 경찰에 붙잡힌다. 영화는 결박된 채 아리랑 고개를 넘는 영진의 모습에 주제가 ‘아리랑’이 깔리며 끝을 맺는다.

나운규가 제작, 감독, 주연을 겸한 흑백무성영화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반영한 이 영화는 2편과 3편이 제작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후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 등 민족의 비애를 다룬 영화가 속속 제작됐다.

이에 비해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신파 연극을 필름에 옮긴 듯한 통속적 내용의 영화가 많았다. 1919년 10월 27일 개봉한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는 부유한 집안의 재산 다툼을 다뤘다. 이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둬 이후 조선 영화 흥행의 발판을 마련했다.

동아일보가 1925년 11월 18∼24일 연재한 ‘조선영화계의 과거와 현재’ 시리즈의 6회 기사에 따르면 1925년 당시 영화제작사는 12곳이었으며 배우학교가 생길 정도로 영화제작에 관심이 높았다.

그러나 일제는 검열을 통해 영화제작을 통제했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23일 ‘영화업자합동 검료감하(檢料減下)운동-류례가 업는 비싼 검열료’ 기사는 당시 ‘3메돌(미터)에 5전’씩의 검열료를 거두는 규정이 새로 제정되자 영화업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는 소식을 전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청구영화사, 고려키네마 등 영화사 20여 곳이 생겼다. 그러나 일제의 검열이 강화되고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영화제작은 어려움을 겪어 제작편수가 1935년에 17편, 1936년에 5편, 1937년에는 4편으로 줄어들었다. 일제가 1942년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발족한 것 역시 조선인의 영화제작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광복 뒤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를 국내 영화인들이 인수해 조선영화건설본부를 설립했다. 당시 제작된 ‘자유만세’(1946년) ‘윤봉길의사’(1947년) 등은 광복의 감격과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그려냈다.

이후 꾸준히 발전해 온 한국 영화계는 1970, 80년대 침체기를 겪기도 했지만 2000년대 들어 산업화에 성공했고 잇따라 대작을 배출하며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 2009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의 총관객은 약 1억5631만 명, 이 중 절반에 가까운 약 7661만 명이 한국영화를 관람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