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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경찰

입력 | 2010-01-20 03:00:00

“독립투사 고문 가혹”
조선민중 원한 쌓여
종로署에 폭탄 투척



1920년대의 서울 종로경찰서. 동아일보 자료 사진


《“◇부내 종로서에서는 계속적으로 대검거를 진행하는 중이라고 ◇평온무사하다는 총독정치 하에서 또 무슨 중대사건이 속출하엿나 ◇주의자(主義者)는 검거, 언론기관은 정지(停止)가 아니면 금지(禁止), 집회와 단체는 위압, 그래도 간판만은 문화정치”

―동아일보 1926년 8월 22일자 횡설수설》
일제 조선총독의 전제(專制)정치 아래 경찰은 총독의 손발이었다. 총독의 경찰정치를 비판한 위 기사의 필자 최원순과 당시 발행인 김철중은 기소됐다. 죄목은 보안법과 신문지법 위반이었다.

3·1운동 후 헌병경찰이 보통경찰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경찰은 ‘무지전능(無知全能)의 괴물’이었다. 동아일보 1924년 1월 22일자는 “공연한 풍설만 믿고 아무 까닭도 없는 객주집에, 밤중에 뛰어 들어가서는 자는 사람들을 벗은 채로 결박을 지어서 수치를 보인다. 그러고는 아무 형적도 없으니까 애매한 어멈의 눈통을 따리고, 수색하노라고 장을 부수고, 시계를 부수고, 게다가 그저 가기는 싱거우니까 공연한 사람을 잡아가지고 간다”며 경찰의 행태를 꼬집었다.

조선 경찰의 특권은 일본 본토 경찰도 가지지 못한 수준이었다. 1928년 11월 29일 동아일보는 “조선에는 제령(制令)이라는 특별령으로 현행범이 아니어도 경찰과 검사가 자유로 인체를 구금할 수 있는 권한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 신수 사나우면 20일간 유치장이나 형무소에서 고초를 받는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경찰에 압수됐다.

경찰은 갖은 방법으로 조선 민중을 괴롭혔다. 피의자를 신문하는 취조와 관련해 “요사이에는 부인의 젖가슴을 만지는 취조가 시작되었다”는 기사와 충북 청주의 경찰관주재소에서 순사들이 강제로 옷을 벗기자 한 부인이 자살했다는 사연도 동아일보 지면에 나타난다. 검거한 독립투사에 대해서는 극악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낸 이서구는 “어느 경찰서이든지 동아일보 기자가 기웃거리면 서류를 감추고 고문을 숨기느라고 신경을 썼다. 오전 중에는 타사와 같이 취재를 하는 체하고 오후가 되면 또 한번 기웃거리게 되니 독립투사를 취조하던 형사들은 거의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언론비화 50편-원로 기자들의 직필수기’)고 회고했다.

경찰의 출입기자 폭행사건도 일어났다. 동아일보 기자 최용환은 1930년 12월 19일 서대문경찰서에서 취재하다 고등계 형사 김립중에게 특별한 이유 없이 구타를 당했다.

여러 경찰서 중에서도 김상옥 의사가 1923년 폭탄을 던진 종로경찰서는 조선 민중에게 ‘원한의 표적’이었다. 동아일보는 종로경찰서 이전을 계기로 1929년 9월 4일부터 22일까지 그 속에서 벌어졌던 갖가지 사연을 ‘종로서 타령’이란 제목으로 12회 연재했다. 바로 항일독립투쟁사 그대로였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경찰은 근대화된 국가 형성에 기여했지만 민주화 과정에서 ‘인권유린 경찰’ ‘정치경찰’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93년 나온 영화 ‘투캅스’는 비로소 경찰도 풍자의 대상이 됐음을 실감하게 했다. 오늘날 많은 어린이들이 장래 희망을 ‘경찰’로 꼽고 있다.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