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래 감독. 스포츠동아 DB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추억’
“월드컵은 평생의 꿈과 희망이었어요. 그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1986년은 한국축구에 아주 특별한 해였다.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 54스위스월드컵 이후 오랜 기다림 끝에 달콤한 결실을 맺었다.
● ‘고지대’보다 두려운 것은 ‘막연함’
월드컵을 앞둔 한국 축구의 최대 화두는 ‘고지대’다. 24년 전에도 그랬다. 오히려 남아공 보다 높은 지대가 태반이었다. 조 감독조차 “조금 뛰니 숨이 턱 막혔다”고 고개를 젓는다. 모든 게 달랐다. 대표팀의 허리를 책임져야 했던 그였기에 부담감도 컸다. “남아공이 높다 해도 멕시코에 비할 수 있을까요. 볼이 튀어 오르는 속도와 방향이 국내에서 훈련할 때와 크게 달랐죠. 예측한 곳으로 볼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대한축구협회의 A매치 상대 섭외가 신통치 않다는 비난이 잦은 요즘이다. 허 감독과 86년 멕시코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조 감독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때는 훨씬 열악했다.
강팀과 평가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90년대 중반까지 AC밀란, 유벤투스, 보카주니어스 등 유럽, 남미 클럽과 평가전을 열고 좋아하던 한국이었다.
● ‘준비한 것만 제대로 했다면’
멕시코월드컵 첫 상대는 아르헨티나. 헌데 경기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정해둔 주전 멤버가 달라졌다.
수비수는 조금씩 늘어났고, 미드필더와 공격수는 한 명씩 빠졌다.
“어쩐 일인지 전체가 소심해졌다”는 게 조 감독의 회상. 주전이었던 그는 벤치 스타트를 했다. 지역 방어가 아닌 맨투맨 수비가 대세를 이룬 시절, 허 감독이 김평석을 대신해서 마라도나를 밀착 마크했다. 마라도나를 막지 못해 한국은 두 골을 먼저 내줬다. 조 감독에게 그 때 기회가 왔다. 그럼에도 공격다운 공격은 할 수 없었다.
조심스레 꺼낸 질문. “기분 나쁠 것은 없어요. 전 상대 크로스의 방향을 읽고 볼을 막으려다 마지막 터치가 이뤄졌을 뿐이니까요.”
대신, 템포에서 승부가 갈렸다고 했다. 변명은 아니다. “리듬과 템포가 큰 차이를 냈죠. 100m를 13초대에 뛰는 우리가 준비한 것과 12초대에 끊는 상대와의 승부는 전혀 다르죠. 졌지만 최선을 다했고, 꽤 선전했죠.”
은퇴경기가 된 86년 사우디와의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전반 7분 선취 골을 넣은 조광래가 오른팔을 쳐들며 기뻐하고 있다.스포츠동아DB
● ‘이젠 말할 수 있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듯 월드컵에 대한 국가적 관심도 엄청났다. 지원도 당시 기준에서 볼 때 파격적이었다.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훈련을 했는데, 한 달 훈련 지원비로 선수 개인당 30만 원이 지급됐다. 이전까지 3만 원이 주어졌으니 ‘월드컵 출전’이란 타이틀이 붙자 10배나 뛰어오른 셈이다.
늘 부족했던 유니폼과 트레이닝복도 풍성히 주어졌고, 선수 개개인 발에 맞도록 치수를 재간 맞춤형 축구화도 처음 신어봤다.
“A업체 관계자가 나와서 발 크기를 적어갔는데, 깜짝 놀랐죠. 딱 맞는 축구화를 신고 잔디를 밟는 기분이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쿵쿵 뛰네요.”
월드컵 무대에서 선전했던 한국은 그 해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제압, 우승을 차지했다. 국제 대회 사상 첫 단독 우승이었기에 의미는 더 했다. 여기서 결승골을 터뜨렸던 조 감독은 또 한 번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금메달 시상식에서 밝힌 깜짝 (대표팀) 은퇴 소동에 축구계가 뒤집혔다. “소속 팀(대우)도 (은퇴를) 전혀 몰랐으니, 아름다운 퇴장은 아니었죠. 그런데 전 32세였어요. 후배들에게도 기회를 줘야죠.”
그렇게 선수 조광래의 시절이 저물어갔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