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연예계와 스포츠계에는 재일교포 출신들이 많다. 일제시대에 강제적, 혹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건너간 뒤 남게 된 한국인들이 사회적 차별을 당하지 않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연예와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외국인을 보는 시각은 대개 두 가지로 갈린다. 유럽이나 미국 출신 백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백인이 아닌 다른 민족을 무시하는 시선이다. 특히 같은 동양인이면서도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의식이 유난히 강하다.
이 때문에 일본 사회에서 주류로 자리를 잡으려는 재일교포 출신 스타들은 자신이 한국인이거나 한국계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긴다. 일본 국적으로 귀화해서 부모가 물려준 한국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성을 고치기도 한다.

일본의 힙합듀오 m-flo. 재일교포 3세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이 그룹은 힙합을 비롯해 소울, 재즈, 보사노바, R&B 등 다양한 흑인 음악을 선보여 큰 인기를 얻고 있다.
▶ 힙합으로 하나 된 한국인과 일본인
m-flo는 힙합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하우스, 재즈, 소울, 보사노바 등 다양한 장르의 흑인 클럽 음악을 선보인 그룹이다. 이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늦은 밤 클럽에서 맥주를 손에 들고 흥에 겨워 춤추는 남녀와 DJ부스에서 믹싱에 열중하는 DJ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VERBAL(본명: 유영기)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로 J-POP계에서 보기 드물게 한국 국적으로 활동하는 뮤지션이자 DJ다. 그는 m-flo에서 랩과 작사를 맡고 있으며 일본 힙합계에서 실력 있는 래퍼로 인정받고 있다.
VERBAL과 함께 m-flo의 또 다른 멤버인 ☆Taku(본명: 타카하시 타쿠)는 일본인이다. ☆Taku는 m-flo 음반의 작곡과 믹싱 등을 담당한다. 그는 힙합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흑인 음악에도 정통한 뮤지션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일본 도쿄의 국제학교에서 같은 반 학생으로 공부할 때이다.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적 재능도 뛰어난 학생이라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사이가 가깝진 않았다.
그러나 힙합은 결국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 VERBAL의 랩 실력과 ☆Taku의 음악적 재능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이었다. ☆Taku가 고등학생 시절 결성한 밴드 N.M.D에 VERBAL이 합류해 활동한 것을 계기로 이들은 음악 인생을 공유하는 단짝이 됐다.
일본 힙합듀오 m-flo의 2004년 서울 공연 포스터. 재일교포 3세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이 그룹은 클럽 뮤직의 대가로 불린다.
▶ 마니아 그룹에서 스타로 부상한 m-flo
학교를 졸업한 뒤 두 사람은 각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다른 길을 걷는다. VERBAL은 보스턴에서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려 했고 ☆Taku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학을 다니며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이 다시 뭉친 것은 1998년. 음악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VERBAL과 ☆Taku는 m-flo를 결성했다. 이후 매력적인 목소리를 지닌 이들의 친구 LISA가 여성 보컬로 합류하면서 인디 그룹으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힙합,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흑인 음악을 탁월한 감각으로 소화해낸 m-flo의 음악은 클럽을 중심으로 마니아 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인디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은 그룹을 결성한지 1년여 만인 1999년 첫 싱글 'the tripod'를 내고 J-POP에 데뷔했다.
2001년 1월엔 7번째 싱글 'come again'이 오리콘 주간차트 4위에 오르고 39만여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m-flo가 일본을 대표하는 정상급 힙합그룹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이 곡은 클럽에서 막 리믹스한 음악처럼 LISA의 감미로운 보컬과 VERBAL의 힙합 느낌이 물씬 풍기는 랩이 각각 따로 노는 듯한 신선한 구성으로 m-flo의 개성을 드러냈다.
이후 m-flo는 대중성이 강한 곡과 함께 미래 사회나 우주를 소재로 한 실험적인 곡도 선보이며 음악적으로도 주목받았다. 보컬 없이 난해한 전자음과 랩으로만 이어지는 9번째 싱글 'Dispatch'는 m-flo의 힙합 감각이 가장 돋보인 대표 작품이다.
▶ m-flo loves 힙합 & 한국
2002년 LISA가 탈퇴한 뒤 m-flo는 힙합이나 클럽 음악에 잘 어울릴만한 보컬을 매번 피처링 방식으로 바꿔가며 곡 작업을 했다. 'm-flo loves OO'(OO에 보컬의 이름을 넣었다) 시리즈가 그것이다.
m-flo가 실력 있는 뮤지션으로 평가됐기에 음반에 참여하는 가수들의 프로필도 화려했다. 아무로 나미에, BoA, 코다 쿠미, Chemistry 등 정상급 스타는 물론, Crystal Kay처럼 가창력이 뛰어난 R&B 가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특히 일본 연예계의 대모(大母)로 불리는 원로 재즈가수 와다 아키코가 보컬로 참여한 곡 'HEY!'는 큰 화제를 모았다. VERBAL이 한국인이라는 점 때문인지 한류스타 BoA나 동방신기의 재중과 유천, 한국가수 휘성과 알렉스, 한국계 흑인 Crystal Kay, 재일교포 와다 아키코 등 한국과 인연이 깊은 가수들과 곡을 선보인 점도 눈에 띈다.
VERBAL은 영어, 일본어에 능통하지만 휘성과 함께 부른 'I'm Da 1'에선 중간에 한국어로 랩을 하기도 했다. m-flo는 여러 차례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으며 그들의 곡은 미니홈피 등의 배경음으로 국내 팬들 사이에서도 각광받는다.
고정 보컬이 없는 'm-flo loves'의 시도는 여성 보컬의 목소리에 따라 m-flo의 곡 분위기가 달라지는 한편, 콘서트 등 공연 무대에 여러 톱스타가 대거 출연하며 분위기를 돋우는 일석이조의 결과를 낳았다.
m-flo는 최근 들어 뚜렷한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베스트앨범이 나오긴 했지만 VERBAL은 래퍼로, ☆Taku는 뮤지션으로 각자의 활동에 주력해 왔다. 팬들은 힙합으로 하나가 된 이들의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