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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박석재]하늘 아끼셨던 고종 황제님전 상서

입력 | 2010-01-21 03:00:00


대한제국 고종 황제님! 정작 펜을 드니 제가 감히 어떻게 호칭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황제님으로 호칭하겠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일본에 1910년 나라를 뺏긴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됩니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면서 황제님과 순종 황제님이 당하신 고통을 생각해 봤습니다. 기우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몸부림치신 황제님의 마지막 시도들에 대해서도 다시 살펴보게 됐습니다.

황제님께서는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천단(환구단)에서 하늘에 제를 지내신 후 즉위하셨지요. 그 의미를 ‘천문대장’ 일을 맡은 제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황제님께서는 중국의 천자와 똑같이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를 지내 나라를 되살리고자 시도하셨던 것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주를 상징하는 국기인 태극기도 황제님의 지침에 따라 박영효 수신사가 그렸지요.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어떻습니까. 최근 그 의미를 파헤친 소설들이 베스트셀러로 자리를 잡으며 우리 가슴을 울립니다. 황제님 덕분에 후손들은 ‘대한민국’이라는 훌륭한 이름을 가진 나라를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가 당연한 듯이 사용하는 책력의 관련법령도 황제님의 1895년 칙령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황제님 이후 100년이 넘도록 전혀 다뤄지지 않아 양력에 음력을 병행하는 책력에 관한 법률이 현재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를 들어 한국천문연구원은 국민에게 법적 근거가 있는 책력에 관한 증명·감정·자료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님! 제국의 부활을 위한 황제님의 눈물겨운 노력을 이 못난 후손은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시 한복판에 남아 있는 환구단을 가보니 ‘황성옛터’가 따로 없었습니다. 담장도 없는 그 초라한 곳 구석에 세워진 안내문을 읽고 외국 관광객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하늘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관심은 대한제국 백성의 그것과 비교해 어림없지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다민족국가 시대에 역행하는 국수주의적 주장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글로벌시대에 들어갈수록 우리의 정체성 확립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더욱 많습니다. 이제 TV 광고 끝마다 ‘본토 발음’을 다는 나라가 돼 걱정입니다.

하지만 좋은 일도 많이 있습니다. 작년 2009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천문의 해’였지요. 저희 천문학자들은 국민에게 ‘국학’으로서의 천문학을 알리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국민이 우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시민천문대도 많이 문을 열었습니다. 아마추어 천문가도 부쩍 늘어나 사단법인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가 마침내 16개 광역시도 지부를 모두 갖추게 됐습니다.

항상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여야 국회의원 14명이 ‘천문법’을 상정해 본회의 통과만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천문법이 통과되면 법적인 근거를 갖고 책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책력이 무엇입니까. 태곳적 해가 지구를 상대적으로 한 바퀴 도는 시간을 한 ‘해’,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한 ‘달’로 정해진 것을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의 기준을 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하늘’의 지식 아닙니까. 이로부터 파생되는 결과물 중의 하나가 바로 달력이지요.

황제님, 아무리 국격이 높아진다 한들 ‘국혼’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야 ‘국운’도 따라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