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사망하자매국노 비난 사설묘지도 파헤쳐져
《“대한독립단은 삼포살(三砲殺)을 일제히 선뎐하얏다는대 그 방법은 여섯명식 한뎨를 지어 중국 륙군의 옷을 입고 말을 타고 긴 창을 가지고 다니며 다음에 긔록함에 상당한 자를 포살하리라고 하얏다더라.”
―동아일보 1921년 4월 23일자》
대한독립단이 1921년 발표한 ‘삼포살 선언’은 반민족 행위의 3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동포의 피를 빠는 자, 무기를 제공하고 귀순해 적과 통래하는 자, 일본의 학교를 경영하고 아이와 청년으로 하여금 적에게 접근케 하는 자가 포살(쏘아 죽임) 대상이었다. 동아일보가 이 유형을 상세히 보도한 데도 친일파의 기준을 대중에게 알리려는 목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친일파들에게 특히 다음과 같은 기사는 경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해 불국 조계의 개천에서 조선사람의 시체 하나를 발견하얏는데…그사람은 상해일본총령사관에 잇든 사람으로서… 조선사람의 행동을 비밀히 령사관에 알이어준 까닭으로 독립당에서 죽인듯하다.’(1920년 5월 10일자)
친일을 꾸짖는 사설도 동아일보에 실렸다. 1922년 4월 9일자 사설에선 ‘자기의 구복을 위하야 양심을 기만하는 자는 친일이 되고 자기의 양심을 그대로 발표하는 자는 배일(排日)이다’라고 썼다. 1922년 5월 11일에는 조선총독의 직속 자문기관으로 전락해 ‘친일파 구제기관’ ‘관료배의 장난감’ 이상의 기능을 못하고 있는 중추원을 폐지하라고 촉구했다. 1926년 2월 13일자 사설은 매국노 이완용 사망과 관련해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 아래 매국행위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의 죄과가 천추만대에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남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친일파의 거취와 친일파 처단에 대한 소식을 이처럼 많은 지면에 할애한 것은 독립의 열망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1923년 3월 14일자에는 신한독립당이 파악한 전국 친일파 분포 결과도 실었다. “극히 자세히 조사하얏고 그 죄목까지도 일일히 들어 그를 수일 전에 발표하얏는대 순사가 뎨일 만코 그 다음은 밀뎡배이오 그 다음은 면장 면서기 등이오 군참사 군수 등 합하야 칠천이백오십사명이고 도별로 보면 경긔도가 뎨일이고 다음은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이더라.”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