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관심 없는 이의 눈에는 유난스러워 보이겠지만 와인과 미술 애호가에게 무통의 라벨 관련 소식은 늘 호기심의 대상이다. 혹자는 선정 작가를 통해 현대 미술계의 흐름을 읽는 재미가 있다고 하고, 혹자는 선정 이유와 라벨에 담긴 시대적 코드를 유추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샤토 무통 로칠드가 매년 새로운 라벨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으로 라벨에 승리의 ‘V’자를 새기면서부터다. 최근 발표된 2007년산 와인까지 라벨을 그린 이는 총 59명.
라벨 작가의 출신은 프랑스인이 4명 중 1명꼴로 가장 많았고 미국, 러시아, 영국 출신이 뒤를 이었다. 아시아인이 그린 첫 라벨은 1979년산이다. 이 와인의 라벨을 그린 도모토 히사오라는 일본 화가는 무통 측의 제안을 받고 처음엔 “별 관심이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친구의 권유를 받고 작업에 들어갔는데 와인이 출시되자 해외시장에서 이 화가의 인지도도 급상승했다. 1991년산 라벨을 그린 두 번째 일본인 화가 세쓰코는 1993년산 라벨을 맡은 발튀스 클로소브스키의 아내로 부부가 함께 무통 라벨 컬렉션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최근 대지진이 일어난 아이티 출신 화가도 있다. 포르토프랭스 태생의 베르나르 세주르네는 1986년산 라벨을 그렸다. 1994년, 47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생전에 여인, 꽃, 풍경 등을 주로 그렸는데 그가 그린 라벨에도 어김없이 여인이 등장한다. 언뜻 보면 백인처럼 보이는 라벨 속 여성의 얼굴 윤곽선을 보면 흑인임을 알 수 있다. 여리고 긴 목, 지그시 감은 눈은 그가 즐겨 그렸던 여성의 모습이지만 오늘날 아이티의 상황과 겹쳐지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라벨은 중국인 서예가 구간(古干)이 그린 1996년산이다. 붓과 먹의 기운이 느껴지는 마음 심(心)이란 글자가 마음에 쏙 든다.
김혜주 와인칼럼니스트
라벨을 디자인한 베르나르 브네는 경기 과천시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세계적인 조각가이다. 라벨은 실제 그의 조각 작품을 손으로 그린 것이다. 거대한 무쇠를 재료로 마치 그림 그리듯 아름다운 곡선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서울 여의도 일신빌딩,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 81%, 메를로 19%로 블렌딩된 이 와인은 로버트 파커에게 94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