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6일 참배 지시참여 안한 학교들줄줄이 폐교당해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당한 학교들의 모습. 1937년 9월 8일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민족주의와 종교적인 이유에서 일제의 방침을 거부한 사학들은 줄줄이 폐교를 당했다. 1937년 9월 8일 동아일보를 비롯한 각 신문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폐교 처분에 대한 총독부 학무국장의 발언을 전했다. “금일의 시국에 잇어서 전 조선의 내선(內鮮·일본과 조선)인이 일체로 되어 황군의 무운을 신사에 비는 때에 어떠한 이유가 잇는지 간에 스스로 이것을 거부하고 또는 아동의 참배를 제지하는 것과 같은 태도는 우리로서는 양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숭실학교 교장 윤산온(조지 매쿤) 박사는 1936년 교육자 자격을 박탈당하고 미국으로 강제 추방됐다. 동아일보는 1936년 3월 23일 ‘숭실의 전도(前途)위해 끝까지 노력해주오/동아일보를 통하야 최후 부탁’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윤 박사의 인터뷰를 실었다.
당시 신문에는 비장한 폐교식 풍경, 굳게 문 닫힌 학교의 모습 등이 담긴 사진도 자주 실렸다. 전주의 기전여학교와 신흥학교도 신사참배를 거부해 문을 닫았다. 1937년 9월 25일 동아일보는 두 학교가 조선 교육에 끼친 공로를 상세히 보도했다. 두 학교는 ‘청옥 같은 눈이 반작거리고 노랑머리가 너펄거리는’ 선교사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리감 때문에 학비를 대주겠다고 해도 한동안 학생이 모이지 않았지만 점점 학생이 늘어 주요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했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일제가 조선 땅에 만든 대부분의 신사가 민간인들에 의해 불타거나 파괴됐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났지만 신사참배가 한국인들의 가슴에 새긴 상흔은 지워지지 않았다. 전몰자와 전범들의 위패를 모아놓은 도쿄의 야스쿠니신사에는 징용 사망자를 포함한 한국인 2만1181명이 합사돼 있지만 일본은 한국의 ‘합사 배제’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일본 정부 고위층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도 늘 아시아 국가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