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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육정수]강냉이밥

입력 | 2010-02-03 03:00:00


1989년 11월 동서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북한 김정일과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가 평양에서 긴급 회동했다.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선 같은 의견이었으나 대처방안은 달랐다. 김은 “군대를 강화하고 인민의 사상 무장을 단단히 하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를 인민들에게 솔직히 시인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20년 뒤 다시 만나 승패를 가리기로 했다. 2008년 김은 쿠바로 카스트로를 찾아가 패배를 자인해야 했다.

▷이 이야기는 ‘김정일과 카스트로가 경제위기를 만났을 때’(저자 신석호 동아일보 기자·북한학 박사)에 나오는 픽션이다. 저자는 북한과 쿠바를 여러 차례 방문 취재한 사실을 토대로 두 나라의 경제회복 노력을 비교분석했다.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의 공산혁명으로 친미(親美)정권이 붕괴된 뒤 50년간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베네수엘라 중국 등의 지원 아래 경제위기 극복에 매진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래 먹는 문제마저 해결 못하는 북한과는 사정이 다르다.

▷1994년 카스트로는 프랑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옥에 떨어져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만나게 될 것이다. 지옥에서 당할 뜨거움 같은 것은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을 계속 기다려온 고통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빵’을 찾아 떠나는 미국행 난민행렬에 대해서도 “가난한 인민이 부자 나라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혁명 35주년, 그의 나이 67세 때 한 이야기다.

▷김정일은 최근 “아직 우리 인민들이 강냉이(옥수수)밥을 먹고 있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고 노동신문이 전했다. 아직도 솔직하지 않다. 강냉이밥이라도 배불리 먹이면 굶어죽는 인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내가 할 일은 인민들에게 흰 쌀밥을 먹이고 밀가루 빵과 칼제비국(칼국수)을 마음껏 먹게 하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현재 67세인 그가 카스트로만큼이라도 인민을 생각한다면 북한에서 굶주리는 주민은 사라질 것이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