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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내일/정성희]SAT 50점과 맞바꾼 양심

입력 | 2010-02-05 20:00:00


“모두가 돈에 눈이 먼 거죠. 이상한 동네예요, SAT 학원가는….” 어느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 강사의 고백대로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 SAT 학원과 강사들의 행태는 시쳇말로 ‘진상’이다. 문제지 유출로 시작된 파문은 SAT 스타강사 납치사건으로 이어지더니 납치당했던 당사자가 문제 유출의 원조라는 주장으로 반전해 미스터리극을 연상케 한다. 그동안 관리감독의 무풍지대에서 떼돈을 벌던 SAT 학원과 강사들이 타격을 입게 되자 서로 비방하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유학가려 不正인생 시작하는 비극

서울 강남구 대치동이 국내 진학학원의 메카라면 SAT 학원은 강남역 사거리와 압구정동에 몰려 있다. 건물 하나 건너 하나씩 보이는 SAT 학원 간판들은 유학준비생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케 한다. 미국 학생 및 교환방문자 프로그램(SEVP)이 공개한 외국인 유학생 현황을 보면 2009년 한국 유학생은 10만3889명으로 중국(11만8376명)에 이어 2위다. 3위는 인도 차지다. 우리나라 인구는 중국의 25분의 1, 인도의 20분의 1인데 말이다.

지난해 처음으로 미국 유학생이 10만 명을 돌파했으니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유학 열기는 가열됐음을 알 수 있다. 10만 명이면 국내 수도권 4년제 대학 신입생 정원(10만6208명)과 맞먹는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SAT 학원이 성업 중인 데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 조기유학을 간 학생들까지 방학이면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그 특별한 무엇은 바로 SAT 문제지 유출에 대한 기대였던 것이다.

가장 큰 책임은 몇 번이고 문제지를 빼낸 학원과 강사들에게 있다. 학원 측은 빼낸 문제지를 ‘살 수 있는’ 일부 학부모와 개별접촉을 하고 거액을 받아왔다.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일부 학생과 학부모의 잘못도 크다. 학부모들은 문제지를 입수하지 못하는 강사들을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으며 문제지 유출을 부추겼다.

SAT 부정행위를 하면 성적이 얼마나 오르는 걸까. 태국에서 문제지를 빼낸 김태훈 씨에게서 e메일로 시험지를 제공받은 고교생 두 명의 SAT 성적은 2400점 만점에 각각 2250점과 2210점이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의 모의고사 성적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점수는 모의고사 때보다 50∼100점 올랐을 뿐이다. 실력대로만 해도 웬만한 대학은 다 갈 수 있는 좋은 성적인데도 ‘몇 점 더’에 매달려 부정행위자가 됐다. 한국식 점수 집착증이 학생의 앞날도 망치고 나라 망신도 초래했다.

우리 학부모들의 이런 경향은 미국 사회의 흐름과 역행하는 것이다. 미국 대학들은 SAT를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꾸고 있다. 2100개의 대학 중 3분의 1이 넘는 739개 대학에는 SAT 성적을 제출해도 되고, 안 내도 상관없다. 학생의 선택권이 그만큼 넓다. 과거엔 SAT 성적 제출을 의무화하지 않은 대학이 음대 미대에 국한됐으나 최근 캘리포니아주립대를 비롯한 유명 대학들도 가세하고 있다.

“똑똑한 학생 많지만 좋은 학생은…”

미국 대학들이 학생을 선발할 때 SAT 성적 외에 내신 에세이 과외활동 봉사활동 등을 두루 고려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 학부모만 SAT를 우리나라 수능시험처럼 여기며 다걸기 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졸업이 쉽지 않아서다.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14개 명문대학에 진학한 한국 학생의 중도탈락률이 44%란 통계도 있다.

“한국엔 ‘똑똑한(smart)’ 학생이 많습니다. 하지만 ‘좋은(good)’ 학생은 드뭅니다.” 오래 학생선발을 해온 미국의 한 대학 입학사정관이 했다는 이 말이 가슴에 남는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