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합 5개조약’ 비준 누락 등 당시 기준으로도 무효日, 영어번역 과정중 각서를 협정처럼 변조까지
국권을 빼앗긴 뒤인 1918년 서울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대한제국 황족과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가운데 모자 벗은 사람이 고종, 그 오른쪽이 순종이다. 고종의 왼쪽은 영친왕이고 영친왕의 옆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조선총독.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제는 한일병합조약이 국제법적 요건을 갖출 수 있도록 치밀한 준비를 했다. 데라우치 통감은 사후 자국 총리에게 올린 ‘한국병합시말’ 기밀문서에서 ‘지금까지의 관련 조약들은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 조약만은 모든 요건을 다 갖추도록 노력했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총리대신 이완용에게도 당부했다’고 적었다.
○ 병합 이전 조약도 국제법적으로 불법
데라우치 통감의 고백처럼 일제가 한반도를 삼키기 위한 단계별 조약들은 모두 국제법적 절차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일제는 1904년 2월 조선의 영토사용권을 골자로 하는 한일의정서, 1904년 8월 외교권을 탈취하는 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군사·내정권을 빼앗는 1907년 7월의 3차 한일협약(정미칠조약) 등 네 가지 조약을 강요해 체결하는 과정에서도 국제법적 결함을 드러냈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해 영토권을 침해한 것으로 정식 조약의 형태를 띠지 못했다. 1차 한일협약에는 협정을 규정하는 제목도 없고, 권한 위임에 대한 기록도 없이 합의사항만 나열했을 뿐이다.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고용하고 외교행위는 일본 정부와 미리 상의해야 한다는 ‘국권 간섭’인데도 외교 조약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직후인 1907년 7월 24일 맺은 정미칠조약도 전권위임 없이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토 통감이 임의로 체결했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당시는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발한 순종이 정식 집무를 시작하지 않은 기간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문서를 변조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 외무성과 서울 공사관을 오간 전보문을 보면 일제는 1차 한일협약을 각서(memorandum)로 취급했는데도 이를 미국과 영국에 보낼 때는 국제법상 ‘협정’을 뜻하는 ‘agreement’를 제목에 넣어 마치 정당한 조약인 것처럼 포장했다. 각서는 작성 당사자들 간의 이해관계에 그치지만 외교조약은 제3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 전권위임과 비준은 필수
한일병합조약의 적법성을 따지는 국제법의 기준은 ‘특정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난 당대 법의 효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시제(時際)법이다. 일본도 “당시 법 기준으로 판단해야지 현재의 법적인 정의로 소급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협약이 무효라는 연구 결과가 잇따르고 있다.
그는 당시 국제법적 기준은 △외교장관이나 외교사절이 아닌 사람에게는 전권위임장이 반드시 필요하고 △조약은 비준되는 게 원칙이었음에도 한일강제병합 관련 조약들은 정식 조약과 약식 조약의 구분도 없고 전권위임장이나 비준서도 없어 당시의 국제법적 기준을 적용해도 무효라는 주장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근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02년 ‘한국병합의 불법성에 관한 연구’에서 을사늑약이 당시 국제법 기준으로도 무효 요건에 해당하는 ‘국가 대표에 대한 강박’에 해당하는 점을 논증했다. 이 교수는 “시제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정의감을 반영한 새로운 법적 관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日정부 “부당하지만 불법 아니다” 계속 주장 ▼
“(한일강제병합 체결) 당시 세계 상황을 보면 그런 행동은 일본에 국한된 건 아닌지도 모른다.”
한일강제병합에 대해 일본 정부가 취한 가장 전향적인 태도는 1995년 10월 5일 사회민주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참의원 본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하지만 그도 ‘병합조약에 기초한 통치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평가로서 깊은 반성과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 “당시의 국제관계 등 역사적 사정 속에서 (조약이)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고 실시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부당하지만 국제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유효부당론’이다.
이후 일본은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일본 우파는 한일강제협약의 합법론을 고수하고 있다. 병합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이 같은 일본 내 기류로 인해 1965년 한일기본관계 조약 2조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도 양국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이를 ‘원천 무효’로 해석하는 데 반해 일본은 대한민국이 수립된 1948년까지는 유효하다고 해석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한일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근대국가의 초석을 다진 메이지 시대에 대해서도 반성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국내 학계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잘못된 인식을 깨뜨리려면 강제병합 체결 당시의 강박적 상황 외에도 국제법을 기준으로 한 절차적 부당성을 견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도 메이지 초기에는 정한론(征韓論·1870년대 전후 일본 정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된 한반도 공략론)을 공공연하게 외치다가 지도층이 서양 국제법 체계를 직접 둘러보고 온 뒤에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자는 주장 자체가 서양 국제법 세계에서는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름대로 국제법 연구에 매달렸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