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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권순택]장학사 플리바기닝

입력 | 2010-02-09 20:00:00


검찰이 범죄를 자백한 피의자를 가벼운 혐의로 기소하거나 형량을 낮춰주는 제도가 플리바기닝(유죄협상제)이다. 피의자가 유죄를 인정하는 사건까지 배심재판을 거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영미법 국가에서 시작돼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대륙법 국가로도 확산됐다. 벌금 액수가 큰 과속이나 교통신호 위반으로 적발된 운전자가 교통경찰관에게 “싼 걸로 끊어 달라”고 읍소해 경미한 주차위반 스티커를 발부받았다면 플리바기닝을 활용한 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 제도를 채택하지 않았다.

▷플리바기닝은 자백이 없으면 증거 확보가 어려운 마약이나 뇌물 사건 수사에 주로 이용된다. 우리 검찰이 대형비리 사건 수사에 사실상 플리바기닝을 적용해온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범죄 수법이 갈수록 지능화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수사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자백을 억지로 받아내기 위한 가혹행위의 유혹을 덜고 수사와 재판 비용을 줄여준다는 것도 찬성론의 근거다.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와 미시간 주의 일부 지역과 알래스카 주는 이 제도를 폐지했을 정도로 찬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플리바기닝과 비슷한 제도로 면책조건부증언취득제도(Immunity)가 있다. 피의자가 될 수도 있는 참고인이 다른 사람의 범죄를 증언해주면 참고인의 죄를 줄여주거나 없는 것으로 해주는 제도다. 서울시교육청 장학사 시험 뇌물사건을 수사해온 검찰이 1100만 원과 500만 원의 뇌물을 준 교사들은 불구속 기소하면서 2000만 원을 줬다고 술김에 폭로한 장학사 고모 씨는 기소하지 않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은 고 씨가 제보자에 해당하고 돈의 성격도 기소된 사람들과 다를 수 있다지만 납득하기 어렵다.

▷검찰이 끝내 고 씨를 기소하지 않으면 면책조건부증언취득제도를 적용하는 셈이지만 플리바기닝과 마찬가지로 법적 근거가 없다. 검찰은 2005년 이후 세 차례나 플리바기닝 도입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범죄자와의 흥정을 용납하지 못하는 국민 법감정, 수사 편의주의와 수사력 저하에 대한 우려 등이 넘어야 할 산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최근 소속 변호사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플리바기닝 찬성이 57%였다지만 여건이 충분히 성숙했다고 보긴 어렵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