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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집중분석]꽃중년과 불황이 日‘료마붐’ 이끌었다

입력 | 2010-02-11 16:00:00


최근 일본에선 '료마 붐'이 한창이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정객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나타난 사회적 현상이다.

'료마 붐'의 중심에는 올해 1월 3일부터 방영된 NHK 대하사극 '료마덴'(龍馬¤)이 있다.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은 방영 이전부터 큰 화제를 모으며 지금까지 최고 시청률 24.4%를 기록했다.

일본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NHK 사극 ‘료마덴’의 한 장면.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은 오랜 불황 속에서 변혁을 꿈꾸는 일본인들을 사로잡으며 ‘료마 붐’을 일으키고 있다. 사진출처=NHK 홈페이지



지상파 방송 채널이 한국에 비해 많은 일본에서 드라마 시청률이 20%대를 기록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보통 15% 이상만 돼도 '대박 작품'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료마덴'의 방영 전후로 일본 서점가에선 사카모토 료마를 다룬 서적이 새로 100권 이상 발간됐다. 특히 드라마 '료마덴'의 스토리북은 지금까지 17만부가 팔렸으며 원작 소설 '료마가 간다'(龍馬がゆく)도 최근 베스트셀러 랭킹 9위에 올랐다.

사카모토 료마가 서양과 교류하며 일본 근대화의 틀을 마련한 나가사키(長崎)에는 특설 전시관이 마련돼 전국에서 관람객들이 쇄도하는 중이다. 여행사들은 그의 고향인 코치(高知) 등을 돌아보는 사카모토 료마 특별관광코스도 속속 선보이고 있다.

TV 드라마가 불을 지핀 '료마 붐'이 사회 각 분야로 전파되는 것이다. 일본 열도를 들썩이게 만든 '료마덴'. 일본인들이 이 사극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 불황에 지친 일본이 바라는 영웅상

일본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조명한 대하사극이 방영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본 문학계를 대표하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장편소설 '료마가 간다'는 '료마덴'을 비롯해 1965년, 1968년, 1982년, 1997년, 2004년 등 여러 차례 TV 대하드라마나 특집 단편극 등으로 제작됐다.

소설 '료마가 간다'는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러하듯, 소설 속의 사카모토 료마는 실제 인물의 삶과 차이가 있으며 상당 부분 미화됐다는 역사가들의 주장도 적지 않다.

무명의 하급무사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는 서양의 앞선 기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일본의 군사력을 근대화하는데 주력했다. 특히 일본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인 점에 착안해 해군력을 증강하는 과정을 이끌었다.

일본 NHK 사극 ‘료마덴’의 실제 인물인 사카모토 료마(좌). NHK 사극 '료마덴'에서 사카모토 료마 역을 맡아 열연 중인 후쿠야마 마사하루(우).



그는 일본 서부 지역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던 사츠마(薩摩) 번(현 카고시마 현)과 초슈(長州) 번(현 야마구치 현)의 동맹을 이끌었다. 이후 이 두 지역을 기반으로 무능과 부패에 빠진 에도(江戶· 현 도쿄)의 도쿠가와 막부에 맞서 싸웠다.

한편으론 나가사키에 스코틀랜드인이 설립한 무역회사 '그라버 상회'에서 대리인으로 일하며 서양의 근대식 무기 등 새로운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메이지(明治) 유신과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일본은 한국, 중국 등 주변국에 앞서 근대 국가를 수립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은 19세기 말 유럽 열강이 근대식 무기를 앞세워 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때에도 독립 국가 체제를 유지하며 오히려 열강 대열에 합류했다.

이처럼 사카모토 료마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무대에서 오랜 세월 변방의 섬나라로 무시당하던 일본이 강대국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일본인들이 그를 영웅으로 존경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일본에선 1980년대 버블경제가 붕괴한 뒤 정체가 이어지는 일본 사회의 모습이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혼란한 시절과 흡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난해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정계의 부패 의혹과 스캔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실망하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일본에선 어려운 시기가 닥칠 때마다 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향수가 반복돼 왔다. 대하사극 '료마덴'이 다시 '료마 붐'을 이끄는 것도 오랜 불황에 지친 일본인들이 변혁을 이끌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바라는 심리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꽃중년'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순박한 료마상(像)

'료마덴'이 인기를 모으는 또 다른 비결은 사카모토 료마 역을 맡은 후쿠야마 마사하루(福山雅治) 덕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기존 사극이나 소설에서 강인한 남성상으로만 그려지던 사카모토 료마의 이미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가수 겸 연기자로 오랫동안 일본의 여심(女心)을 사로잡은 미남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실제 사카모토 료마의 날카로운 생김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올해 41세로 불혹을 넘긴 나이이지만 사슴처럼 동그란 눈과 모성애를 자극하는 여린 그의 얼굴은 '꽃중년'이라는 수식어를 절로 나오게 한다.

NHK 사극 ‘료마덴’에서 사카모토 료마 역을 맡아 열연 중인 후쿠야마 마사하루. 가수 겸 배우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일본 여심을 사로잡아온 그의 인기도 ‘료마 붐’을 일으키는데 한 몫 했다.



실제로 극중에서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연기하는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근대화를 주도한 영웅 이면에 숨겨진 젊은 날의 방황과 근심, 순박함마저 엿보인다. 호쾌한 남자에서 부드러움을 겸비한 새로운 이미지의 영웅이 젊은 시청자들을 흡입하는 것이다.

5회 '흑선과 검'(黑船と劍) 편에선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 해안을 도는 서양의 거대한 흑선을 보고 공포에 질려 검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에선 이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났다.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표정은 마치 영화 '쥐라기 공원'에서 육식공룡 티라노사우루스와 맞닥뜨린 주인공들을 연상케 했다.

괴물 같은 흑선의 등장은 사카모토 료마가 서양의 문물과 기술에 놀라서 무역, 근대화의 중요성을 깨닫는 과정을 담은 장면이다. 하지만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겁에 질려 눈빛이 흔들리는 연기는 강한 남자로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를 한 사람의 젊은이로 그려내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샀다.

이 장면이 방영된 5회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료마덴'을 제작한 스즈키 케이(鈴木圭) 프로듀서도 최근 연예잡지 '오리콘'과 가진 인터뷰에서 '료마덴'의 인기 비결이 사마모토 료마의 이미지 변화에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사카모토 료마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혼란한 시기를 살아간 평범한 젊은이 중 한 사람이었다. 요즘 (불황 하의 일본) 젊은이들과 같은 고민,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래서 젊은 세대가 료마를 가깝게 느끼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