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성적 10∼15등이었던 고1 윤모 군(17·서울 은평구). 그는 지난해 2학기 기말고사에서 반 3등으로 올랐다는 이유로 할머니로부터 ‘포상금’ 10만 원을 받았다. 어머니로부터 “그 돈 엄마한테 맡겨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윤 군은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리곤 1만 원권 세 장을 쑥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주신 돈 전부예요.”
윤 군이 어머니에게 ‘자진상납’한 이유는 뭘까? 어영부영하다가 어머니에게 모두 빼앗기느니, 이렇게 선수를 치면 남은 7만 원이라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은 돈은 일단 문제집 사이에 끼워 놓았다.》
‘비자금 숨기기’ 지능화… 치밀화…
교복 상의 안감 속에…
인형 봉제선 뜯고…
리니지 아이템 사뒀다가
그때그때 팔아 현금조달
쓰임새 많은 상품권 바꿔
옷 구두 화장품 등 사기도
PC방 이용료부터 군것질 값까지, 늘 모자란 용돈 탓에 엄마 몰래 ‘비자금’을 관리하는 중고생이 적지 않다. 비자금을 은닉해두기 위한 학생들의 수법은 날로 치밀하고 지능적으로 변하고 있다. 특히 새 학년을 목전에 두고 각종 용돈을 챙길 수 있는 데다 설까지 있는 2월은 비자금을 비축할 절호의 시기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세뱃돈은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도록 보관해야 한다고 학생들은 말한다. “나중에 대학등록금에 보탠다” “1년 후 두 배로 불려주겠다”는 어머니의 달콤한 유혹에 빠지면 세뱃돈은 함흥차사가 된다는 것.
그래서 많은 학생은 부모에게 절대 들킬 리 없는 자신만의 비자금 은닉장소를 가지고 있다. 평소 애지중지하는 음악 CD의 재킷(플라스틱으로 된 케이스) 사이나 국어·영어 사전 사이는 어머니의 손이 비교적 뜸한 장소. 베개 커버 속에 숨기거나 심지어는 교복 상의의 안감을 뜯어내고 그 안에 숨겨놓기도 한다.
고2 이모 양(18·경남 거창군)은 책가방에 달고 다니는 손바닥만한 곰 인형 안에 비자금을 보관한다. 이 인형의 봉제부분을 약간 뜯어내고 그 속에 돈을 넣어두는 것. 이 양은 “엄마가 늘 지켜보는 인형 속에 버젓이 숨겨두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라면서 “늘 비자금과 함께 다닌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부모는 상상하지도 못한 곳에 지능적으로 숨겨두는 경우도 있다. ‘사이버 공간’이 바로 그곳. 고1 고모 군(17·경기 의왕시)은 지난해 6월 작은 삼촌에게서 받은 용돈 30만 원을 모두 ‘리니지2’(온라인 게임)의 아이템을 구매하는 데 투자했다. 인터넷 카페에서 ‘레어템’(구하기 쉽지 않은 게임 아이템)인 ‘데몬의 지팡이’ ‘베레스의 지팡이’ ‘수령반지’ 등 3개를 비교적 싼 가격에 ‘득템’(아이템을 획득했다는 뜻)했다. 리니지2를 결코 즐기지 않는 고 군이 왜 아이템을 샀을까?
비자금을 상품권으로 교환하는 학생도 있다. 혹시 어머니에게 발각되더라도 은행에 입금을 할 수 없도록 현금 대신 상품권을 구매하는 것. 옷이나 구두, 화장품 등을 구입하거나 영화관람 등 문화활동을 즐기는 데 돈을 많이 쓰는 여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문화상품권은 다른 상품권에 비해 구매가격이 낮고(1만 원 상품권 기준 평균 구매가 9200∼9400원) 서점, 외식업체, 영화관 등에서 두루 쓸 수 있어 애용한다. 최근에는 ‘스타벅스’ ‘커피빈’ 등 커피전문점에서 자체적으로 파는 ‘커피상품권’을 구입하는 학생들도 생겨났다.
고2 임모 양(18·경기 부천시)은 자신의 실력을 이용해 ‘정당한’ 방법으로 비자금을 마련한다. 교내에서 진행하는 각종 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해 부상으로 나오는 문화상품권을 노리는 것이다. 상금 액수는 크지 않지만, 과제가 비교적 쉽고 경쟁률이 낮으므로 조금만 노력해도 상품권을 탈 수 있다는 것이 임 양의 설명이다. 지난해 12월에는 ‘체험학습보고서 우수사례 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해 문화상품권 1만 원권을 받았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임 양이 모은 액수는 15만 원에 이른다. 교통비를 제외한 임 양의 한 달 용돈은 12만 원. 친구들과 영화를 보거나 문제집을 살 때는 이렇게 비축해둔 문화상품권을 사용하고 부모님으로부터 현금으로 받은 용돈은 비자금으로 모아 둔다. 친구 생일선물을 사야 하는데 현금이 없는 경우에는 1000원가량의 수수료를 감수하고 1만 원짜리 문화상품권을 팔기도 한다.
이승태 기자 st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