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세대별 남녀 ‘탐구생활’
최근 케이블 채널 tvN의 ‘남녀탐구생활’이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CF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패러디되고 있다. 설날 벌어지는 남자와 여자의 다른 행동양식을 ‘남녀탐구생활’의 형식을 빌려 구성해봤다.
“남자, 여자를 몰라요. 여자도 남자 몰라요. 사소한 것부터 너무나 다른 남녀의 설날 보내는 방법을 살펴보기로 해요.”
우리 집 귀염둥이 막내 “앉자마자 동물원 원숭이 보듯 봐요”
10代 예비 고3 조카 “대학 스트레스 세뱃돈 위해 꾹 참아요”
오랜만에 친척집에 왔어요. 설날이니까요. 추석에 왔다면 1학기 성적 가지고 친척들이 취조할 게 분명해요. 그럴 땐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부모님 도와드리는 거예요. 설에도 친척들의 속사포 질문이 쏟아질 게 틀림없지만 세뱃돈을 위해 꾹 참아요.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사촌 형과 누나들이 몰려와요. 갑자기 엄마가 안구신호를 보내요. “잘 봐. 저기 저 왼쪽에서 두 번째 형이 바로 천하대 의대생이다.” 가족들이 저녁식사 하고 과일을 먹기 시작해요. 엄마가 나를 끌어다 그 형 옆에 앉혀요. “우리 동수가 공부를 통 안 해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좀 알려줘.” 닌텐도 하면서 시간이나 때우려고 했는데 다 글렀어요. 대충 고3 되면 몇 시간 자는지만 물어보고 방에 들어가야겠어요.
20代 만년백수 종손 “취업 청문회 당하는 기분이에요”
2010년 설 연휴엔 영어학원에서 준 숙제 종합선물세트를 받았어요. 이놈의 학원은 민족의 대명절에도 휴머니티를 느낄 수 없어요. 고딩처럼 숙제를 안고 친척집에 갔어요.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는 엉덩이를 두들겨요. 괜히 혼자 민망해요. “나도 다 컸다”는 말은 식도 저 밑에 삼켜둬요. 바쁘게 음식을 만드시는 엄마를 도우려고 부엌을 기웃거려요. 차가운 도시 남자에게도 가정적인 모습은 필수니까요. 하지만 할머니는 종손이 부엌에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나를 끌어내요. 아버지와 삼촌들이 모여 텔레비전 보시는 자리에 껴요. 지난 명절에 나왔던 질문들이 똑같은 순서로 나와요. “졸업은 언제 하냐” “고시 볼 생각은 없냐” “휴학 때 뭐 했냐” 대답할 겨를도 없어요. 청문회 당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봐요.
어제 야근해서 늦게 일어났더니 그사이 부재중 통화가 10통이나 왔어요. 모두 큰형님과 시어머니 전화예요. 남편이 잘 얘기해놓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을 믿는 게 아니었어요. 남편과 서둘러 시댁에 내려가요. 시어머니를 보자마자 고생하신다며 흰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드려요. 이때 중요한 건 큰형님의 독수리 같은 눈을 피해야 한다는 거예요. 부엌의 실세는 큰형님이니까요. 식사 시간이 됐어요. 올해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질문들이 어김없이 등장해요. 작은애한테서 손자 보고 싶다는 시어머니의 서브에 큰아주버님이 리시브로 이렇게 말해요. “직장 다니느라 힘들 텐데 애 키울 수는 있겠어?” 이걸 큰형님이 받아 스파이크 때려요. “요즘 애들이 자기를 희생하기나 해? 자기 할 일 바쁘지.” 이럴 때 남편이 한마디 도와주면 좋으련만 “역시 형수님 음식솜씨는 따라갈 사람이 없어요”라며 갈비만 뜯어대요.
40代 주부 큰형님 “마음 넓은 형님 되기 힘들어요”
설 연휴 첫날 새벽에 집을 나서요. 아침 일찍 같이 장 보자는 시어머니의 부름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올 한 해 시어머니와 편하게 지내려면 설을 잘 보내야 해요. 힘들게 장바구니 들고 시댁에 도착했어요. 동서에겐 예의상 장 보고 나서 전화해요. 그래야 세상에 둘도 없는 마음 넓은 ‘형님’이 될 테니까요. 한창 기름에 범벅되고 있을 때 명절에만 볼 수 있는 친척이 몰려와요. 나도 그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지만 명절 때마다 기름 뒤집어쓴 모습만 보여줘요. 소시지처럼 꼬마들이 줄줄이 와서 인사하는데 그애가 그애 같아요. 만약 몇 학년인지 물어보기라도 하면 왜 매번 기억 못하냐고 한마디씩 해요. ‘니들이 내 나이 돼봐. 세뱃돈 안 줄까보다’라며 엉덩이를 몰래 꼬집어요. 정신없는 틈에 온 동서는 올해도 시어머니에게 돈을 찔러넣어요. 시어머니는 아침부터 음식 만든 나는 뒤로하고 돈 준 동서에게만 고맙다고 말해요.
50代 간 큰 남자 큰아주버니 “오랜만에 마음 편히 뒹굴어요”
설 전날 엄마집에 가요. 오랜만에 마음 편히 뒹굴 수 있어요. 엄마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내준 과일 먹으며 텔레비전 봐요. 식사 시간 되면 밥 먹고 또 텔레비전 봐요. 그러다 졸리면 자요. 자고 일어나면 대강 저녁때가 가까워져요. 그쯤 되면 식구가 많이 모여서 심심하진 않아요. 저녁 식사는 좀더 많은 사람이랑 먹을 수 있어요. 저녁 먹고 또 과일 먹어요. 과일 먹을 때 조카 한 명씩 불러서 자리에 앉혀요. “직업은 정했냐” “만나는 사람은 있냐” 줄줄이 물어봐요. 젊은 애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하지만 어른으로서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아요. “내가 살아보니까”라고 내 인생철학까지 곁들여 50분 정도만 간단히 말해줘요.
60代 호랑이 시어머니 “내 손으로 키웠는데 크고 나니 다 소용없어요”
올해로 시집온 후 40번째 설 준비예요. 횟수만 늘었지 일의 강도는 줄지 않아요. 그에 비하면 요즘 애들은 정말 편하게 음식 준비하는 거예요. 그런 것도 모르고 명절 때마다 힘들다고 징징대는 거 못 봐주겠어요. 하지만 설에 자식들과 손자 손녀 모이는 걸 보면 묘한 자부심도 생겨요. 1년에 겨우 한두 번 보는 손자 손녀들이 온대요. 어렸을 때 다 내 손으로 키웠는데 크고 나니 소용없어요. 할머니가 엉덩이라도 두들기면 대놓고 찌푸려요. 그러면 자기 엄마 부엌일이 더 힘들어진다는 걸 모르나봐요.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최윤영 인턴기자 연세대 교육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