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 루트’서 만난 4인의 증언
《1960년 4월 19일. 엄청난 규모의 시위대가 서울 시내에 모였다. 이들은 어떠한 정치세력에도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목소리를 냈다. 독재정권의 총과 몽둥이도 이들의 분노를 막지 못했다. 이날의 분노는 하루아침에 폭발하지 않았다. 그해 2월 28일 대구 경북지역의 고교생들이 대정부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후 50여 일 동안 부산, 대전, 마산을 거쳐 4월 19일 서울에서 절정에 달했다. 동아일보는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대구에서 시작해 서울로 이어진 ‘4·19 루트’를 다시 찾아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도화선 된 대구 2·28]
8개 고교 민주화 시위… 동아일보 보도로 전국에 알려
지난달 29일 오후 4시 대구 중구 2·28중앙기념공원 입구. 최용호 2·28민주운동 기념사업회 고문(66)은 “50년 전 대구 도심에 있는 이 공원 부근의 길을 메우고 거리행진을 벌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대구에선 경북고를 시작으로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잇달아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북대 사대부고 학생회 부의장이었던 그는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자유당 정권은 학생들이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몰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일요일 등교를 강행하는 등 무리수를 뒀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죠.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어요.”
대구=정용균 기자 cavatina@donga.com
[교량 역할 대전 3·8]
2·28 대구 시위 소식 듣고 대전고 1000여명 거리시위
15일 오전 대전 중구 대흥동 대전고 정문. 1960년 3월 8일 대전고 시위를 주도한 4·19혁명유공자 박제구 씨(71)는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 감회에 젖었다.
공공연한 부정선거에 국민 모두가 분개하던 때였다.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던 박 씨는 호국단 간부들과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세웠다. “민주당 선거유세가 열리는 3월 8일을 ‘D데이’로 잡았어요. 거사 전날 저녁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학우 10여 명이 모였습니다.”
졸업 후 인쇄업을 해온 박 씨는 “정의를 위해 안위를 내던졌던 사실을 후배들이 잘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기폭제 된 마산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 김주열 군 시신 발견 뒤 2차 의거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는 소문이 나돈 직후, 3학년 선배들을 따라 학교에서 시신이 임시로 안치된 도립마산병원까지 행진을 했습니다. 2차 의거의 기폭제였죠.”
김 의원은 김 군과 함께 공부할 기회는 없었다. 김 군이 마산 친척집에서 입학식(4월 초)을 기다리다 희생됐기 때문. 3·15의거 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낸 김 의원은 “무엇보다 김 군에게 명예졸업장을 안긴 것이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교와 교육당국을 끈질기게 설득해 명예졸업장 수여를 성사시켰다. 1995년 4월 11일 중앙부두 앞에서 진행된 마산상고 사상 첫 명예졸업장 수여식에서 그는 유족을 대신해 졸업장을 받았다.
마산=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민심 분출 서울 4·19]
‘고대생 피습’ 다음날 분노 폭발… 경무대 앞 군중집회
김한섭 소헌한의원 원장(72·전 4·19민주혁명회 회장)은 3일 4·19의 현장인 당시 국회(현 서울시의회)와 경무대(현 청와대) 앞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에서 50년 전을 회고했다.
경희대 학생위원회 대의원이었던 그는 4월 초부터 서울 시내 다른 대학들과 연락하며 시위를 모의했다. 4월 2, 16일 몇 차례 예정했던 시위가 지연됐다. 그러던 중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피습사건이 터졌다. 김주열 군의 사망 등으로 쌓였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국회와 경무대 앞으로 엄청난 군중이 모였다. 김 원장은 경무대 앞 시위에 앞장섰다가 곤봉으로 머리를 맞고, 왼쪽 머리와 등 부위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당시 급박했던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무기를 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광화문 앞을 지날 때마다 50년 전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며 “그러나 4·19 현장에 기념 상징물이 하나도 없어 항상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 4·19혁명은
자유당 정권 선거부정에 항의… 이승만 하야 이끌어
4·19혁명은 장기집권을 하며 10년 넘게 부정부패를 저지른 자유당 정권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학생·시민들의 반정부 항쟁으로 1960년 4월 19일 절정을 이뤘다.
혁명의 시작은 대구에서 일어난 2·28민주운동이다. ‘선거의 해’였던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대구 유세 참석을 막기 위해 학생들의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대구 지역 고교생들은 이에 반발해 집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2·28민주운동이다. 이 시위를 시작으로 4·19까지 전국 고등학생들의 반정부 집회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선거는 결국 부정선거를 통한 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경남 마산에서도 개표 직후 ‘선거 무효’를 외치는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에 참여한 마산상고 김주열 군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김 군의 사진이 도화선이 되어 2차 마산 시위가 벌어지면서 반정부 투쟁이 4월 전국으로 확산됐다.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서울지역 대학생 중 처음으로 행진에 나섰다. 고려대생 3000여 명은 이날 학교에 모였다가 ‘민주 역적 몰아내자’ 등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 중구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까지 행진하며 부정선거 사과를 요구했다. 이 학생들이 돌아오다 흉기로 무장한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자 서울시내 주요 대학은 물론 고교 학생들까지 다음 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 집결한 군중은 10만여 명에 달했다. 경찰이 발포하기 시작했지만 시위대는 세종로를 점거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고서야 오후 5시 시위대를 해산시킬 수 있었다. 4·19 당일에만 104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20일 바로 대국민담화를 발표했지만 민심은 수습되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소요가 계속되던 25일 서울의 대학교수들도 시위에 나섰다. 대학교수 258명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사퇴 압박을 견디지 못한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28일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던 이기붕 씨 일가가 자살하면서 긴박했던 4·19혁명은 일단락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