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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속’도 효자로 뜨나

입력 | 2010-02-16 22:18:19


19세기 후반 한국에 머물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보면 한국에 서양식 스케이트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4년으로 나온다. 1929년 본보 신년호 '조선 체육계 과거 10년 회고'에 따르면 한국인은 1905년 처음 스케이트를 탔다. 그로부터 한 세기도 넘게 흘러 모태범은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00여년의 오랜 세월을 보낸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이 밴쿠버 올림픽올림픽을 통해 새로운 효자 종목을 떠올랐다. 한국은 2006년 토리노 겨울올림픽까지 모두 31개의 메달(금 17, 은 8, 동메달 6개)을 따냈다. 이 중 은 1, 동메달 1개를 제외한 나머지 29개의 메달은 모두 쇼트트랙에서 나왔다. 하지만 밴쿠버 올림픽에서는 16일 모태범이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을 땄고 이틀 전에는 이승훈이 남자 5000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해묵은 메달 편식증을 단번에 고쳤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은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 정상권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올림픽에서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1988년 캘거리 겨울올림픽 남자 500m에 출전한 배기태는 세계선수권을 세 차례 정복한 강자였지만 올림픽에선 5위에 그쳤다.

1992년 알베르빌 대회에서 김윤만이 1000m 은메달을 목에 걸자 곧 금메달의 꿈이 실현되는 듯했다. 하지만 1994~2002년 3개 대회 연속 노메달로 오히려 퇴보하는 모습이었다.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서 이강석이 500m 3위에 오른 후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은 다시 희망을 찾았고 이번에 기어코 일을 냈다.

스피드스케이팅은 0.01초 차로 순위가 뒤바뀌는 기록경기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선수도 당일 컨디션에 따라 기록이 달라진다. 레이스 중 한 번의 실수는 곧 실패를 의미한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1위를 할 수 있다. 모태범의 금메달은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선후배들에게 '아무리 잘해도 올림픽에서는 안돼'라는 패배의식을 깨버렸기에 값진 평가를 받는다.

이번 대회 이승훈의 은메달은 아시아 선수가 장거리에서 성공할 없다는 편견을 깨버렸다. 연이어 터져 나온 모태범의 금메달은 체력과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운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단거리, 장거리 모두에서 통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새로운 금맥이 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질주는 이제 시작이다. 17일 이상화가 여자 500m에 출격해 남녀 동반 우승에 나선다. 모태범도 자신의 주 종목인 1000m(18일)와 1500m(21일)에서 다관왕을 노린다. 이규혁과 이강석도 500m에서의 실패를 딛고 남은 종목에서 명예회복을 다짐하고 있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