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도로정비 계획일제 식민통치 이후수탈편의 위주 재편
1904년까지 진행된 고종의 서울도시개조사업으로 넓어진 동대문 근처 종로길. 사진 제공 태학사
근대의 풍경은 넓어지거나 새로 만들어진 신작로의 풍경이었다. 구한말 지식인들도 도로가 나라의 부강과 직결된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후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도로를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고종은 대한제국 때 수도의 도로를 침범한 집이나 창고를 걷어내 길을 넓히는 작업으로 도시개조사업을 시작했다. 또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모델로 현재의 서울 시청 앞의 도로를 방사형으로 정비했다. 1899년 음력 4월에는 서울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처음 전차를 운행시키면서 근대적인 교통망 확충에도 애를 썼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통치로 자발적인 도로 정비 기회는 박탈당한다.
이 시기에 개수·신설된 도로를 당시에 ‘신작로(新作路)’라 불렸다. 신작로는 조선 정조 때 서울과 수원 화성을 오가는 길을 넓히며 붙인 이름이지만, 우리 인식 속에 일제의 산물로 남아 있는 것은 당시의 대대적인 도로 정비 작업 때문이다.
일제는 1907년에 시작된 제1기 사업으로 진남포∼평양, 목포∼광주, 전주∼군산, 대구∼포항간 4개 노선 255.9km를 정비했다. 일제는 도로개수사업으로 지역간 교통을 원활히 하고 철도사업을 병행하면서 반일적인 민심수습 효과도 기대했다. 당시 대구∼포항, 목포∼광주 구간은 폭 6m, 군산∼전주, 진남포∼평양 간은 폭 7m로 시공했다. 전 노선에는 가로수를 심었다. 2기 사업은 1908년에 시작됐는데 수원∼이천 간 등 7개 구간 총 197.7km가 그 대상이었다.
1911년 4월 일제는 도로규칙 공포를 통해 한반도를 원료공급지와 상품 소비시장으로 바꾸기 위한 신작로 건설을 멈추지 않는다. 도로의 종별, 관리 및 비용 부담에 관한 11개 조로 된 규정이었다. 근대의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1등, 2등, 3등, 등외도로를 비롯한 4종 도로 구분이 이때 이뤄졌다. 1등 도로는 도청 소재지뿐만 아니라 사단사령부 등 군사상 전략 도로였다.
이후 도심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신작로가 뚫렸다. 1921년 7월 25일 동아일보에는 ‘서대문동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 잇든 ‘영성문’(경희궁 출입문)이 헐리기는 작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은 그 영성문 자리로부터 남편으로 정동까지 탄탄한 신작로가 새로 뚫려 잇다’고 전하고 있다.